자소서에 쓰기 위한 유럽 일주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여행의 모습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넘어왔다. 4월인데도 이곳은 여름이었다. 유럽의 일교차를 생각하며 두꺼운 옷을 잔뜩 챙겨 왔는데, 결국 참다못해 민소매 셔츠를 사 입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 최대 도시답게 사람이 많고 시끌벅적했다. 공사 중인 곳이 많아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여유롭고 조용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밀라노에 오니 가슴이 방방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밀라노는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많은 패션 아이템을 쇼핑할 수 있고, 고급스럽고 맛있는 식당이 즐비해 있다. 특히 밤 문화가 발달해, 전 세계 사람들이 클럽 투어를 위해 밀라노를 방문한다고 한다. 나는 밀라노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아 클럽에 가지 못했다. (내가 간 날이 월요일이기도 했다. 월요일에는 모든 클럽이 문을 닫는다. 슬펐다.)
닫힌 클럽 앞을 지나며 다음에 친구들과 밀라노에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글로벌 기업 빌딩 숲을 지나 걸어 내려오자 두오모가 나왔다. 밀라노는 전통적인 건물과 현대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조금만 걸으면 상반되는 풍경이 나온다. 두오모, 스칼라 극장, 브레라 미술관과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스포르체스코 성 등 꼭 봐야 할 역사적인 곳들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시간을 쥐어짜가며 무리하게 볼 필요는 없다. 과거의 나는 하나도 놓치기 싫어 악착같이 뛰어다니며 여행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밀라노는 여유롭게 하루에 한두 곳씩 둘러보는 게 좋다. 걷다 지치면 거리에 꼭 하나씩 있는 맛있는 젤라또 가게로 가자. 사실 밀라노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했던 건 이 젤라또였다.
날씨가 덥다는 핑계로 하루에 서너 번 젤라또 가게나 카페에 갔다. 관광지에서 빠져나와, 가게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거리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이곳의 일부가 된 기분이 들어 좋았다. 밀라노 여행은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다 느낄 정도로. 아무리 바쁜 도시라도, 내가 어떻게 여행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에센스와 기억이 달라진다. 어떤 마음으로 머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아는 지금, 나는 젤라또를 하나 더 사 먹고 아쉬움 없이 밀라노를 떠났다.
이탈리아의 도시 중, 가장 다시 오고 싶었던 곳은 피렌체였다. 피렌체의 돌길을 걸을 때 발에서 느껴지는 촉감,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노을의 색을 잊을 수 없었다. 피렌체 역을 나와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계속 가슴이 떨렸다. 피렌체는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곳이다. 거리의 화가들이 우피치 미술관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두오모에서 거리의 가수들이 버스킹을 한다.
사람들은 성당 벽 옆에 아무렇게나 기대앉아 책을 읽는다. 그들과 같은 공간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야들야들해진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예전에 조금 좋아했던 사람과 함께 피렌체의 두오모에 오른 적이 있다. 뻔하지만,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봤고, 영화 속에 나오는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좋았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가슴 절절해하며 그 말을 간직했다.
그 후 좋아하는 사람과 우연히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게 되었는데, 역시 얼마 못 가 헤어졌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낭설이었고, 이제 그 영화도 더 이상 가슴 절절하지 않다(비현실적이야!) 그래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피렌체의 두오모는 혼자라도 오르고 싶을 정도로 여전히 예뻤다(더 슬프게도 이제는 체력이 부족해 오르지 못했지만…).
대신, 밤에 맥주를 들고 아르노 강으로 가서 베키오 다리를 바라봤다. 낮의 베키오 다리는 영업 중인 보석 상점들 때문에 정신이 없지만, 밤에는 아무 소리 내지 않고 강 위에 서 있다. 밤의 강가에서 혼자 바라보는 피렌체는 낮보다 훨씬 더 서정적이다. 맞은편을 보니, 이탈리아 언니가 혼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언니를 따라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평소 즐겨 듣던 노래가 자동 재생됐다. 이제 앞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피렌체의 밤공기가 생각나겠지. 언제든 다시 재생할 수 있는 기억을 하나 만든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약간은 알게 된 후 떠난 유럽 여행. 서툴고 욕심 많았던 첫 번째 여행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를 위한 것들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유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소란한 마음을 달래기에 최적인 곳이다. 다음 여행과 그때 또 달라져 있을 나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을 촘촘하게 쌓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