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로스 Jan 11. 2019

튕기는 나란 남자

나는 무조건 튕기고 보는 남자였다. 상대가 나를 좋다고 표현해도 애써 모른 척하고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면 시큰둥하게 넘겼다. 데이트하자고 해서 만나면 그 자리에서 대화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상의 뭔가는 거의 하지 않았다.


반대로 관심이 생기는 사람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결심하고 말을 건네본 적이 있긴 하지만 잘 되어가려는 느낌이 들면 내가 먼저 관계를 정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만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곧장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동네에 있는 주점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는 데 과제가 항상 많은 학과라 오랜 시간 일하진 못 했다. 그렇게 한 달에 대략 30만 원 초반을 벌어서 알뜰살뜰하게 썼다.


차비는 학교가 집에서 가까운 관계로 안 들었고, 식사는 가능하면 저렴한 학생 식당에서 해결하고, 술값은 다들 나눠내는 분위기라 가능하면 참석 안 하려고 했다. 옷은 누가 사주기 전까진 내 돈 주고 사질 않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여행 가자고 하면 나는 항상 빠졌다.


그 당시에 나는 만원 이상 쓰는 걸 어려워했다. 나의 심리적인 마지노선이랄까. 그 이상 쓰면 그날은 무리하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무리해서 쓰는 게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데이트라니. 보통 나는 데이트할 때 이런 돈 계산을 한다.


일단 만나서 밥을 먹는다. 이왕 만나서 먹는 건데 상대방이 먹고 싶은 걸 사주고 싶다. 적당한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각자 파스타와 레몬에이드를 시킨다. 그다음엔 느끼한 입맛을 달래기 위해서 커피를 한 잔 하러 간다. 주문하는 곳 옆에 있는 투명한 진열장엔 각양각색의 케잌들이 수두룩하다. 왠지 치즈 케잌에 눈길을 자주 주는 듯해서 같이 주문한다. 열심히 대화하느라 꽤 오래 앉아있었더니 일어나서 놀고 싶다. 근처 노래방에 가서 성대를 적셔줄 물과 음료를 하나씩 주문한다.


나는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있다. 내가 돈이 있을 땐 상대방에게 얻어먹지 않는 것이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매번 친구들에게 얻어먹기만 하고, 밥을 얻어먹을 때마다 눈치 보며 제일 싼 걸 시켰던 후유증인 듯하다. 지금 생각하면 솔직하게 얘기하고 적당히 나눠서 냈으면 됐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금전 사고방식 때문에 20대 후반까진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면 먼저 돈 계산을 했고, 당연히 모든 여자들과 데이트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튕기고 또 튕기고 한 번 더 튕기고. 마지막까지 튕겨나가지 않고 버티는 여자에겐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 나는 데이트할 돈도 없다고 말이지.


그래도 만날 수 있다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끝도 없는 자격지심과 괜한 우울감에 이별 통보를 하고 집에 와선 질질 짰다. 그런 이유로 나의 연애 기간은 보통 반년을 넘지 못했다. 그 시기가 되면 상대에게 가장 깊게 빠져들어서 정신 못 차릴 때여서 겁이 났다. 애써 숨겨온 못난 모습이 드러날까 봐.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마 더 강하게 튕길 듯하다. 애초에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다면 시작 안 하는 게 맞으니까. 책임질 자신과 능력이 없으면 시작을 안 하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걸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