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 언니가 예민한 사람이라고요? 언니처럼 밝은 사람이 무슨. 말도 안돼!"
독서 모임에 참가했던 서른 살 어느 가을 날, 같은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은 내가 예민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직장, 모임과 같은 사회망 속에서 나는 밝고 사교적인 사람이었으며 네트워크에 적응하기 어려워 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배려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밝은 미소로 응대했으며 농담도 편하게 잘 하고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지냈다.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고, 교류속에서 배우는걸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향을 가졌다.
일반적인 통념에 맞지 않는 두 개념을 가지고 나를 설명하는건 늘 어려웠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처럼, 밝고 외향적인 사람에게 예민하다는 표현은 어딘가 어울리기 힘든 구석이 있어보인다. 피겨선수 김연아 님에게 농구선수 서장훈 님의 옷을 걸쳐입힌 느낌이랄까.
외향적이고도 예민한 나의 모습을 고백할 때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받아치는 반응에 점점 지쳐갔다. 어릴 땐 이런 내 모습을 이해 받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열을 내어 나를 설명했다. 예민함은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성이 아니라며, 외향적인 나도 충분히 예민한 사람일 수 있다고 내가 믿는 내 모습을 증명하려 애썼다.
'나는 소리에 예민해, 나는 말 한 마디에 예민해, 나는 생각보다 빨리 에너지를 소진해, 나는 모든 자극에 민감해서 하나를 봐도 여러개를 생각해. 나는 문제점과 분위기를 예리하게 파악해, 나는 쉽게 피곤해져. 혼자서 쉬어야 하는 시간이 너무 중요해.' ...
새롭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외침은 더 커져갔다. 내가 알고 있는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 받고 싶었다. 한 없이 밝지만 한 없이 예민하기도한 이 모습을, 밝은 모습만 사랑해주는게 아니라 가시가 돋힌 장미처럼 뾰족한 모습도 미리 알고 사랑해달라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 속에는 예민하면 사랑받기 힘들다는 공포가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 나의 예민함을 부정적으로 여기더라도 굳이 그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나조차 내 예민함을 싫어했으니 예민한 기질에 대해서 토설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외향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있다는 명제를 알기 전까지 나는 수 많은 전쟁을 치뤄야했다.
<예민함이라는 무기> 에 따르면 외향적이고 예민한 경우는 예민함 중에서도 예외적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충만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다가, 자신만의 쉼이 필요할 때 긴 여행을 떠나듯 쉬는 특징이 있다. 예민한 외향인은 내향인보다 훨씬 더 타인과의 공존이 어려울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예민함을 설명해야 하는 일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 살아 갈 수 없다. 인간은 타인과 교류를 완전히 끊어내고 살 수 없이 때문에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가정 내에서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예민한 특성을 사랑하는 내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특성을 단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설득시키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히 공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이다.
예민하고 외향적이고 밝은 사람. 이 세가지 특징만으로도 표준에서는 멀어졌다. 하지만 표준에서 멀어졌다는게 비정상을 의미하진 않는다. 비정상이라는 틀에 갖히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고,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무엇하나 쉽지 않은 예민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마저 미운 존재가 되어버리면 우울에 취약해진다. 타인에게 향하는 밝은 미소를 자신에게 보여주기가 참 어려워진다. 나는 나에게 가장 야박한 사람이었고, 예민함을 잣대로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괴롭혔다.
통제 할 수 없는 우연과 사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실수, 지혜롭지 못한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만나기 괴로웠던 인연과 상황을 만들었다. 그럴 상황이 반복 될 수록 내 예민함은 하데스보다 더 어두운 악령이 되어갔다. 하지만 악령 처럼 느껴지는 내 예민함을 영원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여겨선 안되겠다고 깨달았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사람이 있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왜 예민한 사람은 감정적인 어려움에 쌓여 살아가야 하는거지?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다. 세모는 세모다. 그 누구도 동그라미가 가진 모양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무도 세모의 뾰족한 각을 욕하지 않는다. 예민한 기질도 마찬가지이다. 허허실실 걱정이 없는 사람의 모양이 있고, 곤두선 안테나를 24시간 내내 돌리며 사는 사람의 모양이 있다. 예민한 기질이 어려운 기질이라고 누가 먼저 정의했는가?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그 정의를 내가 따를 필요가 있는가? 이 생각이 들자 마음 깊숙한 저편에서 해방감이 몰려왔다.
들키면 안될 어두운 면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민함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머리와 마음을 잠잠해 지길 기다렸다. 내 예민함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민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따뜻한 말을 건낼 수 있었다. 예민하기 때문에 오감이 발달했고, 그 중 보고 듣는 감각이 기민하여 내가 느끼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데 강했다.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지점을 잘 파악하여 섬세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했다. 나의 예민함은 숨겨야 할 모습이 아니라 누구보다 나를 잘 설명해주는 강점이었다. 그리고, 나의 외향성은 이런 내 예민함을 더 밝게 비춰 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예민함이 내향적인 사람과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통념에 불과하다. 흔하지 않을 뿐, 예민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예민한 기질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말자. 그저 오해로 점철 된 내 상처를 바라보며 평온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허용하는게 우선이다. 표준적이지 못하고, 무던하지 못하고, 평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내려두고 그저 그 생각을 가만히 한 번 바라보아야 할 때다. 나는 예민함과 외향성이라는 설명에서 온건한 자유를 느꼈다.
예민하고 외향적인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가지 특성이 충분히 공존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알아주는게 필요하다.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자신을 가둘게 아니라, 이 특성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프레임이 아니라 설명일 뿐이다. 당신은 외향적이고 예민한 사람이며, 평온하고 충분하다.
#예민함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