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내가 기억하는 여름밤 풍경은 유독 해가 길다. 뻐꾸기시계가 일곱 번을 울어도 밖은 환하다.
8시가 넘어야 해가 지기 시작하고 어스름해진다. 낮 동안 잠자리를 잡다가 들어와서 씻고 저녁밥을 먹고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선풍기 앞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서 일기를 쓴다.
일기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
오늘은 파블로였다가 내일은 집시가 되어서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을 떠돌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 여름밤 풍경을 떠올리면 옥주의 여름 방학이 가여워서 견딜 수 없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엄마의 부재를 매 순간 떠올리며, 할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옥주와 동주.
어린 동주와 달리 사춘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옥주, 살던 집보다 더 넓은 집이 마냥 좋은 동주와 고모부와 사이가 안 좋아서 할아버지 집으로 온 고모가 반갑기만 한 동주.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를 몰래 만나고 와서 누나한테 호되게 당하면서도 엄마가 준 선물을 절대 손에서 놓지 못하는 동주를 옥주는 밀쳐내고 결국 울린다.
옥주는 한순간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발을 크게 굴러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엄마 만나면 가만 안 둬!라는 (말뿐인) 협박을 할 뿐,
내 상태가 어떻고 기분이 어떤지 설명하지 않는다. 가족한테도, 썸(?)을 타는 남자 친구에게도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다.
그런 옥주는 어떤 여고생이 되고 어떤 사람이 될까. 누군가한테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 옥주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옥주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담담하게 자기의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고모에게 모기장 한 켠(동생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을 내어주고,
설렘의 감정을 느꼈던 남자아이한테 애정을 철회(회수)하고 돌아오면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동생을 따돌린다. 그렇게 아빠나 할아버지 모르게 혼자 조용히 혼란스럽게 여름밤을 통과한다.
영화는 극적인 지점이 단 한순간도 없다. 남매를 버리고 간 엄마를 다시 만나는 장면도 그렇고,
옥주가 첫사랑에 눈을 뜨고 실패하는 장면도 그렇고,
할아버지 집을 두고 아빠와 고모가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은근하게, 소소하게 그려진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극 전체가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이 보다 한 시절을 통과하는 일정 시간을 일상적으로 더 잘 보여줄 수는 있는 방법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영화만 놓고 보자면 지나치게 현실적이지 않은가 혹은 낭만이 없지 않은가, 하는 안타까운 의문을 품게 된다. 두 어린 남매의 성장 서사가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비극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가 만들어놓은 환상이 아닐까.
그러니까 어린 시절 우리가 통과했던 여름밤은 사실 그다지 극적이거나 총 천연색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너무 작아서 운동장이 커 보였을 뿐이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뭐든 할 수 있었던 것뿐.
지나간 시간은 미화되고 아름답게 남은 것만 추억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에 덧칠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 엄마가 어린 나를 포대기에 싸고 뛰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 그런데 그건 꿈일 수밖에 없잖아"라는 고모의 고백처럼,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가 갖고 싶었던 과거를 그럴듯하고 아름답게 재직조한 것은 아닐까.
여름밤을 떠올리면 갖게 되는 인상들, 총천연색의 노을 풍경이나 미화된 기억 속의 시골집 풍경, 대청마루에서 듣던 동물 울음 소리나 파도 소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옥주가 통과하는 여름밤과 가족이 만들어낸 한 시절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
*일전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보고 나오면서
연인과 한국의 남성 감독의 영화는 10년 전 '아저씨'에서 한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직후에 '남매의 여름밤'을 보게 되었다.
물론 취향이 적극 반영된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겠지만,
남성감독이 똑같은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법론에 골몰할때
여성 감독들은 지난 10년 동안 성실하고 꾸준하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 골몰해왔다는데 의견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