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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Feb 22. 2023

살고 싶어요, 그저 내 인생을 유영하고 싶어요

백혈병 재발 판정 날 쓴 일기 - 새벽감성


3년 전 처음 백혈병 진단을 받을 때가 생각나요. 진단받을 때의 감정이 어땠냐고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생각도 나오지 않았어요. 말이 병의 위압감에 짓눌리게 되눈물이 나오는 거구나 생각하게 됐죠. 그래도 고시공부 잠깐 그만둘 수 있어 마음이 조금은 트인 것 같긴 하네요.

그때의 감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뇌에 각인이 된 듯 선명하게 보였어요. 나를 사랑해 주는 주변 사람들, 가족, 가족과 다름없는 나의 오래된 남자친구를 슬프게 하기는 싫었거든요. 마치 로봇의 로직처럼 자동적으로 사고회로가 만들어졌었어요.

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저를 진심으로 감싸줬어요. 교사인 엄마는 제 소식을 듣자마자 교실에서 뛰쳐나와 저 먼 마산에서 제가 있는 서울성모병원까지 5시간 만에 달려오셨어요. 아버지는 오랜만에 친구랑 골프 라운딩을 가셨는데, 딸이 아픈데 공이나 치고 있었다고 한동안 많이 자책하셨어요. 언제나 애기로 보였던 동생도 그날은 언니행세를 하며 부모님을 진정시켜 주었고요. 본가에서 쉬던 남자친구도 제 전화에 바로 달려와 응급실 곁을 지켜줬어요. 남자친구에게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하지 못했어요. 남자친구가 우는 걸 6년 만에 처음 보았거든요. 평소에 눈물이 없는 친구였기에 가 처음 울게 되는 날이 오면 몇 날며칠을 놀리겠다 다짐을 하기도 했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다짐을 했을까요. 그 친구의 눈물로 무거워진 슬픔은 다시 나를 향하여 날 더더 가라앉게 만들 뿐일 텐데.


'이 사람들이 슬퍼하는 건 보기 싫어, 그러니 내가 강인하게 무찔러보자!'


그래서 강인하게 버텼어요. "괜찮아"라는 말을 자동응답기마냥 플레이시키며 항암 과정을 이겨내었어요. 이석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간호사 쌤들에게도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모범생이 필요 없는 병원에서 모범생이 되었죠. 하지만 항암과정은 모래사장 위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았어요. 견고한 모래성을 만들어 퇴원하려 했으나, 퇴원 전까지 작은 밀물 썰물에도 전전긍긍해 댔고, 한 번은 그 작은 썰물이 제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기도 했어요. 저는 항암 부작용으로 하반신 신경 손상을 얻게 되어, 걸을 수가 없는, 아니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것 때문에 1년을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보았고, 지금도 걷는 것 말고는 기능이 없는 로봇 수준의 걷기 능력만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시 그들이 바라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멋지게 이식도 해내고 작년에는 학교에도 4년 만에 무사히 복학했어요.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 제가 다시 이전의 로 돌아가는 걸 축하해줬어요. 저도 '일상'으로 복귀하는 길이 기대가 되었요.


그런데 제가 병과 싸우는 이 긴 기간 동안, 누구는 검사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누구는 고시에 합격하고 혹자는 대기업 사원이 되었대요.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과 일찍 작별하기도 했는데 말이죠. 제가 동경하고 좋아하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데 '허울 좋은 최고'에 대한 욕심도 버려지지 않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이러한 괴리 사이에서 저는 무척이나 방황했답니다. 학교친구와 있을 때, 환우들과 이야기할 때는 마치 내가 마블의 주인공이라도 된냥 멀티버스 차원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어요. 마침내 나는 양 세계를 조율해 보려고 애썼어요. 나는 환자이기에 환우로서의 본분은 충분히 자각하고 잊지 않되, 내가 아프기 전 꿈꾸던 '멋있는 삶'으로 가는 도전도 멈추지 않겠다는 투지를 타올리려 했죠. 이 꿈들을 담을, 고양이가 그려진 귀여운 노트도 준비했어요.


근데 저는 왜 세상이 저를 물 먹이는 느낌이 날까요. 하필 이 중차대한 결심을 한 날, 저는 재발판정을 받게 되었어요. 이제 학교에 적응해서 경제학회도 해 보고, 피아노 동아리에도 들어가려 했는데... 왜 하필 이때일까요. 난소와 유방, 코 등에 미세잔존암이 있어 다시 항암치료를 해야 한대요. 항암의 끝은 이식이기에, 제가 그토록이나 지키고 싶었던 머리카락도 마지막엔 잘라야 하겠죠. 그리고 이제는 저를 무조건적으로 응원해 주던 남자친구도 없어요. 상황의 무게가 너무 짓눌릴 듯 무거워 더 이상은 함께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의미이겠죠. 그래도 못난 빡빡이 모습을 다시 보여주지 않아도 돼 다이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드네요.


솔직하게 말하면,  더 살 자신이 없었어요. 항암 하며 당혹스러운 다리 장애까지 얻게 되었는데, 그냥 '항암치료가 잘 된 후 행복하게 살아갈 날들'보다 '지금 당장 눈앞의 행복'에 취하다 자연스럽게 끝을 맞이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웃기죠, 남들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내가 다시 아프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어요. 20만 원짜리 사진을 찍고, 200만 원 가까이하는 노트북을 사고,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과감해졌어요. 이때 깨달았어요,

"아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싶었던 것이구나. 나는 이렇게 죽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많아."

저는 잘 살 수 있을 진 모르겠는데, 일단 죽기는 싫네요. 하고 싶은 게 많이 남았어요.


항암 치료는 예전보다 더 두려워요. 모르는 이의 '잘 될 거다'는 말에는 이유 없는 반항심이 끓어올라요. 이 세상은 희망과 노력을 배신하기도 하고, 권선징악 따위 지켜지지 않는 불가해하고 복잡한 곳이란 걸 알아버렸으니까요. 그래도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항암치료를 해야겠죠? 아는 맛이 더 매섭다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에요.


그래도 하늘에 감사한 게 있다면, 다시금 두 발로 세상을 유람할 찰나의 시간을 준 것.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게 된 순간이 비록 반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반년 지난 7년 보다도 더욱 알차게 서울을 즐겨냈어요. 우선, 내가 사랑하는 연세대학생으로서 뿌듯한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웨이팅이 기본 한 시간인 핫플도, 나이 28살에 교복 입고 롯데월드 가 보았답니다. 가족들이랑 투탁거리며 인천 앞바다로, 평창으로, 한강으로 여행하는 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이 기억들을 양분 삼아 앞으로는 재항암을 버티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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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떤 마음으로 버텨 볼까요? 취업과 성공만을 꿈꾸며 왔는데, 이제는 이 길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계획하고 컨트롤한 대로 인생이 움직여주지 않을 것 같아요.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잡아주던, 항상 옆에서 응원해 주고 삶의 동력이 되어주었던 남자친구는 이제 없기도 하고요.

재발 직후 모든 악재가 한 번에 몰아칠 때, 제 인생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채 간신히 버티는 촛불 같다'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은 그 말은 너무 슬프다며 '오뚝이'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 제안하셨어요. 하지만 쉴 시간도 없이, 자의 없이 항상 오뚝 일어서야 하는 오뚝이의 삶도 가혹할 것 같네요.


저는 이제 그냥 파도에 얹혀 타는 바람이 되고 싶어요. 어디를 향할지, 누구를 덮칠지 모르는 파도 속에서 그저 이 스릴을 즐겨볼까 해요. 적어도 정신은 쏙 빼놓을 수 있겠네요. 가끔은 파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바다에 잠식되더라도 다시 건조해질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자유롭게 바다를 상공을 유영하고 싶어요. 통제당하고 통제하지 않는 삶,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요. 인생의 풍파도 파도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않을까요. 무질서 속의 질서, 그 카오스를 한 번 견뎌보려고 해요.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년에 이 글을 볼 내가, 지금의 나를 '이해한다고, 고생 많았다'라고 꼭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의 파도를 펼쳐내기엔 새벽이 너무 짧네요.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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