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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Sep 26. 2023

[단편소설]독서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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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엘리베이터였다.

  “저기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그녀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얼른 앞에 있는 열림 버튼을 누르자 ‘고맙습니다’ 하면서 그녀가 뛰어 들어왔다. 어쩐지 그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는데,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실제 날리진 않았지만 바람에 찰랑거린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내 곁에 서자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짙은 쌍까풀에 큰 눈망울과 단발머리. 내 지갑 안 사진 속 그녀와 닮아 보였다. 특히 왼쪽 눈 아래 작은 점까지. ‘뭐지 이건? 영화에나 나오는 평행이론 그런 건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퇴근 시간이 지난 무렵이라 엘리베이터는 한산했다. 그녀는 층수를 누르지 않았다. 이 안의 누군가와 같이 내릴 것 같았다. 눈을 떠 옆자리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같이 내려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아냐, 날 이상한 놈으로 보겠지! 우리 회사 사람이라면 더 미친 짓일 것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려는 용기가 뜬금없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지만 운에 한번 맡겨 보기로 했다. 만약에 그녀가 나와 같은 층에서 내린다면 말이라도 걸어 보는 것으로. 다른 층에 내린다면 인연이 아닌 것으로.     


  14F.     


  14층에는 라디오국과 아나운서국, 그리고 경영지원국이 있었다. 평소에는 내 사무실이 있는 15층에서 내렸을 텐데 부국장 호출로 14층 회의실에 가는 길이었다. 8층과 9층 그리고 11층 엘리베이터 버튼이 눌러져 있었다. 그녀가 14층에서만 내려준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8층과 9층을 지나쳤다. 방송 온에어 시간에 쫓겨 마스터 테이프를 들고 달리는 것보다 더 쪼는 맛을 느끼며,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휴대폰으로 가린 채 곁눈질로 그녀의 손을 봤다. 다행히 반지는 없었고 손가락에 반쯤 가려졌지만 <시녀 이야기>란 책이 들려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사원증 줄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도착 음과 함께 11층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인연은 여기서 끝인가?’ 덜컹 엘리베이터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내려야 하나?’

  그때, 그녀가 옆으로 비켜서고 대각선에 있던 남자들이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 심장이 빠르게 들먹이는 소리가 들릴까 봐 숨을 참았다. 시간이 정지한다는 게 이런 걸까? ‘저기요’부터 시작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생각도 못 했는데 그녀와 단둘이 남게 되다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저기요, 제가 아는 분하고 닮아서’라는 말은 너무 진부한가? 무슨 말을 해야 자연스러울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1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도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렸다. 총총걸음으로 그녀를 쫓아가며 ‘저기요’를 외치려 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무슨 일이죠?”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앞선 그녀가 빠르게 걸으며 말을 했다.

  “저기요, 사실은…….”

  복도에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로 뒤에서 들린 내 목소리에 앞서가던 그녀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최대한 뒤로 뺀 채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귀엔 무선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전화 속 상대와 이야기를 이어가며 또각또각 발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주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부국장이었다. ‘국장님 자리로 바로 올라오라’고 말한 후 부국장은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팔꿈치가 간지러웠다.

  15층 국장실에 앉아 부국장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부국장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파일럿과 백업용 프로그램을 몇 개 준비하는데 그중 하나를 같이 하라는 이야기였다. 기분이 상했다. 보통은 외주업체가 이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내 입봉작이 망했으니 그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빨리 내려가 그녀를 다시 찾고 싶은 마음에 알겠다고 답하자 국장은 부국장과 이야기할 게 남았다고 그만 가보라고 했다. 국장실을 나오며 열려있는 문을 천천히 닫았는데 마지막에 뭔가 걸렸는지 문이 꽉 닫히지 않았다. 작은 틈새 사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을 몇 번 밀었지만 제대로 닫히지 않자 국장은 그냥 가라고 손짓했다. 문틈 사이로 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아래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야근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을 순 없었다.   

  

  다음 날 하릴없이 14층을 배회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와 사무실을  오가며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출퇴근길에 짧은 머리의 여자를 보거나 집에서 TV를 보다 단발머리 여자만 나와도 그녀 생각이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마다 어김없이 14층에 내려 슬쩍 주변을 훑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새롭게 맡게 될 프로그램 기획 회의가 열렸다. 작가들과 김 선배, 그리고 조연출이 참석했다. 방송 제목은 <책방과 책맹, 그리고 도서관>. 비록 가제라고 적혀 있었지만 제목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책맹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책은 나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약간의 난독증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책보다는 영상이나 영화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한글은 일찍 뗐다. 5살 때는 밤늦도록 책을 읽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리하지 말라며 책을 뺏곤 했다. (우리 부모님이 봤을 때 천재처럼 보인 내가) 책과 아주 멀어진 건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준 서울대 선정 세계문학전집을 강제로 읽어야 했던 것과 중학교 때 독서를 지도했던 선생님 볼에 난 사마귀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한 장짜리 독후감을 써서 아빠에게 보여줘야 했다. 독후감을 쓰지 못했을 때는 느낀 점이라도 이야기해야 했다. 그 숙제를 끝내지 못하면 밖에 나가 놀 수 없었다. 한여름 찜통더위 속 방에 갇혀 책을 읽을 때면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때마다 이유 없이 팔꿈치가 간지러웠다. 살이 쓸릴 때까지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팔을 보며 자주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곤 했다. 담 넘어 ‘경환아 놀자’고 외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외침도 점점 사라져갔다. 친구들과 마음껏 놀지 못해 쌓인 짜증에 더해  선생님 사마귀에 난 털을 보고 있으면 오른쪽 팔꿈치가 마구 간지러웠다. 이상하게도 한두 줄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된 것이 난독증으로 이어졌다고 나는 술자리에서 자주 이야기했다.

  담을 쌓은 것은 책만이 아니었다. 내 방에 들어갈 때면 늘 방문을 닫았다. 그 즈음 아버지와 새엄마의 언성이 자주 높아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빛이 샐 틈도 없이 방안을 어둡게 만든 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친엄마가 놓고 간 영화 DVD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프로그램 제목이 좀 약한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들은 김 선배는 가제라고 하면서 책의 날을 맞아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보다 5년 선배인 그가 책을 좋아한다는 건 주변에서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막심 고리키나 버지니아 울프 등의 이름이 인쇄된 양장본 책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그와 러시아 작가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톨스토이에 대해 나무위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로 설명을 하며 회의 시간을 다 잡아먹었을 것이 뻔했다. 조연출과 나이 어린 작가들은 왜 우리가 러시아 문학에 대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본인들의 휴대폰을 보거나 수첩에 낙서하며 점심 메뉴를 생각할 것이다.

  “저는 다른 거 하면 안 되나요?”

  “야, 너 저번에 프로그램 말아먹은 거 땜빵 해야지. 피디도 직장인이잖아. 어떻게 직장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냐?”

  혼자 맡아서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나를 끼워서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김 선배는 나와 조연출, 작가들에게 실무를 맡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예산이 많지 않아서 진행은 아나운서가 하고 VCR 용으로 3개 정도의 영상만 말면 되는 규모였다. 기획안 밑에 해외 출장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웨덴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예산이 없어 출장을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옆에 김 선배의 이름이 작게 들어가 있었다.    

 

  작가들이 잡은 일정에 따라 진행자와 실무 미팅이 이어졌다. 회의실에서 작가들과 진행자를 기다리며 조연출의 휴가 뒷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볼펜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는데,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녀였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가 슬로모션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나운서인 그녀의 이름은 이지수. 스포츠 중계를 위해 며칠 동안 출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해서 이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직접 지원했다며 잘 부탁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어정쩡하게 내가 일어나자 조연출과 작가들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를 다시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일로 만나다니. 아주 자연스러웠다.

  “박 피디님 그런데 뭐 좋은 일 있어요?”

  작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요?”

  “저번 회의 때는 똥 씹은 표정이더니.”

  “제가요? 자연만 보다가 이렇게 사람과 일하니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것 이외에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특징이 있고, 차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살짝 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알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만 회의실을 나왔다.

  “박 피디님.” 그녀가 나를 불렀다.

  “네!” 대답과 함께 몸이 용수철처럼 자동으로 그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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