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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무 Jan 22. 2022

유년의 기억 2

-영주경찰서 뒤에 살 때-

    

며칠 전, 엄마와 언니, 동생과 함께 언니네 집에서 모여 놀았다. 내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집들을 표시한 그림을 보여주니 엄마와 언니가 내가 태어난 집은 영주 ‘신신 상회’라는 포목점 겸 한복집 안채라고 알려줬다. 홍수가 나서 새로 지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주택에서 몇 년을 살다가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경찰서 뒤로 이사한 것은 아마도 서울로 이사하기 위해 주택을 팔고 잠시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좀 높은 지대에 집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넓은 마당엔 꽃들도 많았고 나무도 꽤 우거졌고 넓은 나뭇잎이 있는 나무도 있었다. 언젠가 ‘간송 미술관' 뒤뜰에서 파초를 보며, 기억 속 나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았던 공간은 주인집 옆에 붙어있었는데, 마당에서 건물을 보면 우리가 사는 곳이 오른쪽이었다.  

   

방안에 또 하나의 방이 있는 구조였다. 부엌은 방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땐 사촌 오빠와 외사촌 오빠는 서울과 안동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였고, 우리 오빠 방은 안방에서 창문 같은 문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다. 다락은 아니지만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요즘으로 보면 스킵플로어 구조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내 기억이 맞는 거라면, 좀 이상한 구조다. 엄마 말로는 예전엔 집을 지어놓고 자꾸 덧붙이거나 쪼개서 방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주인집 부엌은 커다란 나무 문이 있고, 기둥에 커다란 건전지를 묶은 라디오를 걸어두었던 생각이 난다. 라디오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 하는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이은관의 '배뱅이 굿'을 자주 들었던 기억도 있다.   

  

주인집 아저씨는 나쁜 주사가 있었는지 술을 마시고 아줌마를 때렸다. 우리 엄마가 말리려고 주인집 방에 들어갔는데, 아저씨가 자기 옷을 마구 벗으니까 엄마는 '아이고머니~'하며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느 날, 아저씨가 또 아줌마를 때리는데 우리 아버지가 마침 집에 계셨다. 아버지는 주인집 방으로 들어가 주인아저씨 멱살을 잡고 마루로 끌고 나오더니 야단을 쳤다. 그리고 마당으로 가방을 던지고 한 달 안에 집에 들어오면 철창에 집어넣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후 정말 그 아저씨는 한 달 뒤 돌아왔고 아내를 때리던 버릇을 고쳤다고 한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한 후에도 아버지는 서울로 발령이 안 나서 오래 그 집에 계셨는데 주인아저씨와 관계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요즘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당시엔 아버지가 경찰이었기 때문에 주인아저씨가 겁을 먹은 모양이다.     


그 집에 살 때, 언니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는데 정말 뱀처럼 보이는 장난감을 나한테 줬다. 나는 그걸 자랑하려고 우물가로 가서 애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던 아줌마가 '어머나!' 하며 놀라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느 날은 자다가 오줌을 쌌는데, 동생 핑계를 댔다. 엄마는 크게 야단은 치지 않고, “아이고 옷은 지 께 젖었구먼.” 하며 웃었다. 그 일 말고 무슨 저지레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다. 엄마가 벌을 주느라고 농기구를 넣어두는 조그만 창고에 나를 들어가게 하고 문을 닫았다.

"엄마, 엄마~"

하며 우니까, 엄마가 문을 벌컥 열고,

"엄마한테 야단맞는데 엄마는 뭘 찾나?"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 아버지~" 하며 울었다.

엄마는 이번에도 문을 열며 말했다.

"아버진 여(여기) 없다!" 

그래서 그냥 엉엉 울었다.     

 

사촌 언니의 남편인 강철수 형부가 자주 놀러 왔던 생각도 난다.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자주 놀렸는데, 어느 날은 너무 서러워 마당 한 귀퉁이 나무 아래 돌덩어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때마침 그때 외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우는 나를 달래셨는지 그냥 얘기만 해 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 할머니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또렷하다.   

   

할머니가 냇가에 빨랫감을 들고나갔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보니 예쁜 나무 상자가 하나 떠내려왔단다. 옷을 걷고 냇물로 들어가 상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그게 바로 나인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얘기를 멈추고 나에게 물으셨다.

"언니가 없어도 괜찮나?" 

내가 아니라고 도리질하니까,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아기는 내가 아니라 언니이고 그래서 형부도 언니가 알면 자기 부모 찾으러 갈지 몰라 일부러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한다는 거였다.     


그날 이후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이 하나도 서럽지 않았고, 불쌍한 언니가 집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비밀을 지켰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언니도 나도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딸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밖에도 영주경찰서 뒤에 있던 그 집에 사는 동안 기억나는 일이 몇 가지 더 있다. 


멋쟁이 아가씨였던 사촌 언니가 뾰족구두를 신고 오면 몰래 그 신발에 내 발을 넣어 보곤 했다. 


언니가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동생 한 명씩만 데리고 사진관에 갔다. 동생들은 아직 학생이 아니지만, 입학생인 것처럼 가슴에 손수건을 예쁘게 달고 언니들은 더 의젓한 모습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사진 속 나는 새초롬하고, 동생은 곱슬한 짧은 머리에 앞이마가 볼록한 짱구이고 엄마 무릎에 앉아 있다.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언니는 제법 숙녀처럼 보인다. 우리 엄마 얼굴은 까맣고 말랐다. 그래도 살짝 미소 짓는 엄마 얼굴엔 주름이 없다. 엄마의 젊음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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