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Nov 03. 2019

전자음악 입문 5

잘하고 싶다

수업은 열심히 잘 듣는데,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참으로 고통스럽다. 너무 고급 기술만 배워서 써먹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음악으로 쌓아온 세월이 조금 더 많았으면 나았겠지, 싶지만 어쩔 수 있겠나. 많은 것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렇게 내려놓고 했던 지난 숙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쉽게 내려놓지 못하겠다. 이제는 무엇이 부족한지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을 찾는 것이 다음 시간까지 숙제인 것 같다.


음악 수업을 들었던 몇몇 선생님께 질문했던 것이 있다. "음악을 만들고 만들다 보면 언젠가(조만간) 더 이상 만들 수 있는 음악이 없지 않을까요? 경우의 수로만 놓고 보면 무한하겠지만, 좋은(경계가 애매한 단어) 음악이 되려면 말이지요. 좋은 것에 새로워야(역시 경계가 애매함) 함은 당연하구요." 선생님들마다 대답이 달랐는데, '이미 모든 것은 다 나와 있고 거기에서 조금 다른 무언가를 넣는 것을 음악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다.' 아니면 '그렇지 않다, 새로운 것은 계속 나올 것이다.' 여전히 잘 모르는, 배우는 입장에 있지만, 저 두 대답은 사실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제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냥 재밌어서 하거든요. 그냥 재밌게 하시면 되는 것 같아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요? 이게요? 엉엉...




망원 근방에서 합정까지 한강을 따라 걸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뭔가 해야 하고 시간은 없지만, 한강만큼 기분을 풀기 좋은 곳도 없는 것 같다. 겨울이 오면 못 갈텐데 어쩌나 싶고, 다시 봄이 와서 오랜만에 찾아가면 매우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강에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숙제 생각만 했다. 그들에게서 무언가 영감을 얻길 바라면서. 영감을 얻는다고 무엇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님에도 말이다. 무언가 하나를 알면 파바바밧하고 끝날 것 같은데, 그런 걸 알려주는 사람은 왠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마냥 걸었다. 기분이라도 좋아지길 바라면서.


선생님께서 숙제를 못하면 다음 수업을 미루자고 하셨다. 하지만 수업을 미루는 일 같은 걸 내가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셨겠지. 수업을 미루는 것은 그저 괴로움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매우 좋지 않음은 알고 있다.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이 본질인데 그저 괴로움을 줄일 생각만 하고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랜 세월 견지해 온 삶의 방식이다. 정해진 마감은 지키자, 그것을 미룰 수 있더라도. 잘해야 한다는 어디로 갔을까. 쓰다보니 큰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해야지 임마.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면서 무엇을 상상하실까.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의 숙제를 떠올릴까. 숙제를 보여줄 때의 부끄러움은 초등학교 때 못 쓴 글씨로 적은 전과(ㅋㅋ) 베껴 쓴 숙제를 내밀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담임 선생님께서 참다참다 너네 숙제 내주면 맨날 전과 베껴오는데, 창의적으로 해올 수는 없냐고 화를 내신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전과를 베꼈다. 아니, 내가 정리해도 결국 저 것인 걸 어떡해요.




지난 주 숙제는 3가지였다. 808, 909, Amen break 로 각각 뭔가 만들어보기. 그래서 이 3가지를 모두 이어 붙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따로 따로 했다고 뭐가 됐겠나. Amen break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침 볼비가 뛰어올라와 건반을 눌러주었고, 거기에 리코더를 대충(!) 불어서 적당히 붙여서 넣었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숙제를 들으시고는 그냥 패스하셨다. 나머지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면서 이것저것 만져주셨는데,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갈게요' 하고 지나가셨다. 대~충 해서 홀랑 넘길 생각같은 걸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최소한 웃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저 소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아마 언젠가 적었을 지도 모르겠다. 2년 전에 들었던 ㅇㄹ 님의 노래 만들기 수업 마지막 시간에 노래를 만들어서 갔는데, 내가 작정하고 쓴 가사에서는 반응이 정말 싸늘했다. 나는 재밌으라고 쓴 것이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냥 써서 불렀던 부분들에서 반응이 더 좋았다. 그러니까, 뭘 하려고 하지마. 그냥 해, 그냥.


판교의 하늘과 비트는 무관합니다



선생님의 하늘은 저와는 많이 다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