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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Aug 26. 2024

사내변호사의 기쁨

승소가 전부는 아니다


보통 변호사들은 대리인으로서 일을 한다. 다른 사람의 사건을 대신 맡아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내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대리인이라기보다는 당사자로서 일을 많이 하게 된다.


로펌이나 법률사무소라면 의뢰인들이 찾아와서 ‘변호사님~ 제 억울한 사건 좀 해결해 주세요!’라고 의뢰를 하고, 변호사가 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마음으로 그 의뢰인의 사건을 해결해낼 것이다.


그렇지만 사내변호사라는 직위는 의뢰인과 대리인의 그 중간 어디쯤 있어 보인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일상적인 법률적 질문이 있을 때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해주는 것을 자문 업무라고 부른다. 이런 자문 업무가 있을 때는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해주기 때문에 보통의 변호사 업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송무 업무로 가면 그 역할이 많이 달라진다.




우선 의뢰인인지 대리인인지부터 구분해 본다면 사내변호사는 명확하게 의뢰인이다. 소송이나 중재를 가도 대리인으로 변론을 하고 판사님이랑 이야기 나누는 것은 우리 회사를 대리해 주는 로펌의 변호사들 뿐이고 사내변호사는 변론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내변호사는 의뢰인으로서의 심장이 점점 커진다. 우리 회사가 소송이나 중재를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알게 되는 사실들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불을 지핀다.


우리 회사 김 과장이 이렇게 이메일을 남겼는데, 상대 회사 박 과장이 분명 이렇게 답신을 남긴 것이지? 그런데 막상 계약 이행일이 다가오자 이렇게 계약과 다르게 행동하더니, 뭐?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던 거라고?


아이들을 키우며 점점 키워진 공감능력까지 더해져서 우리 회사를 상대로 사기 친 놈이 엄청나게 괘씸해진다.

열이 받는다. 10년 전 이메일들이지만 이메일에 계속 밑줄로 치고 또 치고 하면서, 사건의 담당자들은 이미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때의 그 상황이 나는 점점 더 생생해진다.


안 되겠어!

이 놈들한테 떼인 돈을 내가 받아오고야 만다!


사내변호사는 로펌 변호사들을 만나 씩씩거리며 사안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송무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은 소송이나 중재의 과정에 대해서 잘 알지만 생소한 하나의 산업 분야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반면에 사내변호사는 본인이 속한 회사의 비즈니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내변호사는 의뢰인의 심장을 가진 채 변호사의 머리로 구체적인 사안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사내변호사가 있는 회사가 중재나 소송을 가게 되면 주로 현업팀, 사내변호사, 로펌변호사 이렇게 3개의 주체가 한 팀이 되어서 사건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내변호사는 미묘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


현업팀의 직원이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의 당사자였다면 우리 회사 직원이 증인이 되어 증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부터 사내변호사는 증인인 듯 증인 아닌 증인 같은 변호사가 된다.


재판을 가기 전까지는 우리 회사를 대리하는 로펌에서 우리 회사에서 꼭 하고 싶었던 우리의 주장을 서면에 잘 담아줄 수 있도록 초안을 써서 주고 작성해 온 서면을 열심히 보고 피드백하고 했다면, 재판 직전에 가서는 증인과 혼연일체가 된다.


재판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행동에 있어서 조심할 점이라든지, 긴장을 해서 원래 잘 알던 사실들도 이상하게 헷갈리게끔 말하지 않도록 원래 알던 사실들을 차근차근 잘 정리해서 이해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준비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인이 되어서 10년 전 사건에 대해 진술한다는 것은 퍽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 긴장을 하고 예민해진다.


이럴 때면 사내변호사는 변호사로서의 역할보다는 그냥 인간대 인간으로서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괜찮을 거라고 북돋아주는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내 업무 범위가 여기까지가 맞나라는 고민이 들 새도 없이 우리 사건이 잘 진행되려면 위로도 하고 등도 토닥이고 그 와중에 고3 아들 핵심내용 잊지 않도록 계속 리마인드 시켜가면서 밥도 먹이고 컨디션도 관리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농구팀의 스타플레이어가 증인으로 나가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라면, 로펌 변호사들이 농구코치가 되고 그때 사내변호사는 그 농구팀의 매니저가 되는 격이다. 매니저가 된 사내변호사는 여기저기 기름칠하고 선수들 간식 챙기고 땀 닦아주고 그 와중에 코치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서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코치에게 달려가서 정신 차리고 지금 A전술 써야 될 때라고도 말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구단주로서 선수들과 코치가 묵을 호텔도 계산하고 밥도 끼니미다 계산하고 너네 잘하면 보너스도 줄게 살살 구슬려야 하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그 모든 돈을 쓰는 건 또 내 돈이 아니고 법인의 사장님 돈이라서 방만한 운영이 되지 않도록 사장님 눈치도 봐야 한다.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역할이 요구된다.




사내변호사는 이렇게 본인 회사의 사건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 상당히 애지중지하게 되어서 길고 긴 하나의 여정이 끝나게 되면 그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과 후련함과 섭섭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마치 내가 애지중지 키우던 병아리가 어느덧 수탉이 되어서 떠나보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우리 회사가, 그리고 몇 년 동안 내 사건에 애정을 가졌던 내가 일말의 후회도 없이 준비했던 것은 모두 쏟아내고, 경기 당일에 큰 실수 없이 좋은 컨디션과 팀워크로 사고 치는 놈 없이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


그 소송이라는 경기의 결과로 ‘승소’를 하면 더할 나위 없이 너무나 좋겠다. 그렇지만 훌륭한 결과, 좋은 결과가 나올지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런 훌륭한 경기를 만들 수 있었다면 그 자체 만으로도 숨어있던 사내변호사는 혼자 우선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다. 사건의 대장정의 막을 내릴 때 구석에서 혼자 눈시울을 붉히며 칵테일 몇 잔에 기분 좋게 취해서 웃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의 기쁨.


그게 바로 사내변호사의 작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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