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근자씨의 서재 - 수필집은 어떤 감동이 있을까?

by 근자씨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피천득 / 민음사


이 책은...

'깨끗한 문장으로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가, 한국 수필에 미학적 기준을 세운 피천득 산문집'
KakaoTalk_20260405_224300064.jpg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뒤표지, 모든 책들이 그렇듯이 칭송의 말들...

소설보다 더욱 손이 잘 안가게 되는 장르가 시집과 수필이 되었다.

대학시절엔 왠지 시집과 수필집이 좀 더 낭만 있었다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자기 개발서, 인문학, 간간히 소설을 읽게 된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자기 개발서를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좀 더 나아진 나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이젠 책이든 영화든 좀 더 잔잔한 내용이 편하다.

사실, 시집과 같이 고도로 압축된 문자언어로 표현된 글은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종종 피곤할 때도 있다.

피천득 님의 수필은 어떨까?

28300009.JPG 차와 간식, 독서의 가장 좋은 동반자들.

어땠을까?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쓰인 느낌의 산문집이었다.

그냥 들고 다니며 찬찬히 읽어보면서 나의 인생의 페이지들을 곱씹어보게 된 책이다.

'나이 들어감'에 대한 부담감이 점점 크게 느껴지는 요즘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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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글을 쓴 작가는 부르주아였던 것일까?

이 산문집에는 그의 딸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자식이 없는 나는 그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이 보편적인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일제 경찰의 감시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고백 같은 글에서 그의 솔직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In the Book...


봄 p. 29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토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오래전 그녀의 모교를 찾았을 때 어린 젊은 친구들의 얼굴에서 싱싱함이 보였다. 나는 늙었다. 그래도 아직 감성만은 충만한 것 같은데… 나는 나이를 헛으로 먹은 것인가… 아직 철이 덜 든 것인가)


오월 p. 35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봄이 좋다. 특히 5월이 좋다. 낮에는 따뜻해서 포근한 느낌이고 밤에는 시원하다. 그리고 휴일이 많아서 좋았다. 이제 5월이 오면 약간은 서글퍼진다.)


여성의 미 p. 43

참다운 여성의 미는 이른 봄 같고 맑고 맑은 생명력에서 오는 것이다.

p. 44

‘원숙하다.’ 또는 ‘곱게 늙어 간다’라는 말은 안타까운 체념이다. 슬픈 억지다. 여성의 미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약방문은 없는가 보다. 다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그런 것들이 미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어떠한가? 동안? 그것은 이미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도 동안이 좋긴 하다. 늙어 보이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선물 p. 53

선물은 아름다운 물건이라야 한다. 진주 목걸이, 다이아 반지, 댄스 할 때 흔들릴 팔찌, 이런 사치품들도 좋은 선물이다.

(사치품 선물을 받아보고 싶다. 지난 1월 나에게 태어나서 가장 비싼 선물을 했다. 고가의 중고 필름카메라. 새 제품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천만 원이 넘는 카메라를 사기에는 아직 나는 서민이다. 사치품을 선물로 받아보고 싶다. 명품백을 선물로 받는 여자의 기분은 어떨까?)

33780038.JPG 사치품을 선물하고 싶다.

플루트 플레이어

p. 56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65070020.JPG 무음의 연주가 들리는가? @예술의 전당, Film, Canon AE-1


p. 57

토스카니니가 아니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 무명의 플루트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때는 가끔 있었다.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댄서, 사진작가, 에세이작가가 되고 싶은 때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p.60

나의 친구 중에 이런 분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여러 해 고학을 하였다. 그런데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때보다 실직을 했을 때가 더 행복스러웠다고 한다. 주인에게 복종하느니보다는 호콩을 먹으면서 길을 걷는 것이 즐거웠었다고 한다.

(무작정 퇴사하고 쉬었던 6개월이 내 인생 가장 즐거웠던 시기였다. 평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몇 시까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아침이 반가웠다. 차도 있으니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아무 때나 갈 수 있었다. 오히려 차도 안 막히고 유명한 곳이라 해도 평일 낮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저녁에 약속이 있더라도 부담이 없었다. 회사라는 주인, 사장이라는 주인, 부사장이라는 주인, 팀장이라는 주인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나만의 주관적인 시간들이었기에 즐거웠을 것이다.)


찬란한 시절 p. 110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91330026.JPG 아빠와 아이, 누가 더 행복할까? @삿포로, 필름사진, Nikon FE

(1910년에 태어나신 분이 유치원을 다니셨다니 무척이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인가? 나도 유치원을 다녔지만, 나의 그 시절에도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유치원시절이 찬란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생각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인연

p. 137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을 이야기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왜 악수도 없이 헤어졌을까? 아사코의 세월에 원래 기억의 아사코가 아니기에 아사코가 아닌 아사코와 악수할 수 없어서?)


도산(島山) p. 145

내가 병이 나서 누워 있을 때 선생은 나를 실어다 상해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겨울 아침 일찍이 문병을 오시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 장례에도 참례치 못하였다. 일경의 감시가 무서웠던 것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보다도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인지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 많다. 계엄을 선포한 자. 그를 동조한 자.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는 자들. 그들은 과연 죽음 앞에 도달할 때까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까?)


셰익스피어 p. 152

민주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는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치옹 p. 173

“가난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으니, 이제 가난을 벗어난 것인가?)


나의 사랑하는 생활 p. 188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 가고 싶다.

(나 또한 그러하다.)


멋 p. 190

멋있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궁상맞지 않고 인색하지 않다.

멋있는 사람은 멋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91330032.JPG 멋이 있으려면 외관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 @삿포로, 필름사진, Nikon FE

(점잖게 늙어 가면서 또한 나이 들어서도 계속 멋있는 사람이고 있다.)


이야기 p. 201

“나는 말주변이 없어.”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아둔한 사람이다.’ 하는 소리다.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방식에 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후진 국가가 아니고는 사회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요새 정치인들의 표현은 너무나 증오의 단어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증오의 단어를 내놓고 나열한다. 그리고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다. 머릿속에 증오의 단어들만 가득 찼으니, 그들을 볼 때마다 불쾌함이 올라온다.)


잠 p. 207

눈같이 포근하고 안개같이 아늑한 잠, 잠은 괴로운 인생에게 아름다운 선물이다. 죽음이 긴 잠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회사 업무와 그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잠 못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 회사를 그만둔 이유 중에 하나였다. 퇴사 이후 잠을 잘 잤다.)


여린 마음 p. 242

고장 난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비행기 안에 아는 사람이 하나 없어도 기뻐한다. 중동에 휴전이 되었으면 기쁘고, 파나마 조약이 인준되었다고 기쁘다.

사람은 본시 연한 정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연민의 정은 냉혹한 풍자보다 귀하다.

소월도 쇼팽도 센티멘털리스트였다.

우리 모두 여린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인생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린 마음으로는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 나의 여린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다. 독한 사람이 되어야 리더도 되고 사업에 성공도 하기 쉬운 세상이다. 그래서 다 같이 행복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우정 p. 251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91330036.JPG 왠지 우정이 있을 것 같은 손님과 상인 @삿포로, 필름사진, Nikon FE

(사랑의 비극적인 결말 또한 불신이 시작일 것이다.)


송년 p. 266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고 다 살 만하다.

(보통 나이대별 기대치와 평균치가 있다. 우리나라는 그 기대치와 평균치에 벗어난 사람을 대부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뭔가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본다는 말이다. 나는 단지 평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도 아니다. 나도 무척이나 평균의 삶을 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길을 돌아갈 수도 없다. 그냥 어떻게든 잘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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