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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다리며?

by 배우 박수연


연극영화과 복수전공을 시작하면서, 친구와 고전 희곡을 읽는 스터디를 잠깐 했었다. 기억에 남는 책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21살이던 나는 내용에 완전하게 가닿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계속해서 이 책을 만나게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전통 사실주의에 반하며 쓴 전후 부조리극이라서 내용이 친절하지는 않다. 주인공 두 명은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한다.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며, 농담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국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고도'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고도는 희망이기도 하고, 좌절이기도 하다. 고도는 신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다. 언젠가 찾아올 평화이기도 하고, 언어이기도 하다. 각자만의 '고도'가 있는 것이다. 그 '고도'를 기다리며, 매일을 씨름하고 기다린다.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사건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2인극이라서 '내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으며, 마치 시를 읽었을 때처럼 내가 느낀 어렴풋한 감상만이 남았었다.



그리고 영화 <미쓰 홍당무>에서는 주인공 두 명이 축제 무대에 설 희곡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습한다.


"아니,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아니, 정말 고맙습니다.

원 별소릴 다하는군."


영화 내내 이 희곡을 연습하던 둘은 결국 축제 무대에 서게 되고, 등을 지고 서서 서로를 들어 올리며 대사를 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명장면이다.




나는 왜 갑자기 <고도를 기다리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배우라는 일이 사실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내가 맞이할 나의 '고도'를 꿈꾸고, 그리고, 희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은 지금의 나를 압박하고 초라해한다.

그렇지만 희곡에서도 영화에서도 그 순간의 인물들은 주인공이다. 그 대사를 읊는 순간에도 그 사람들은 살아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풀어지는 마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고도'의 순간에 내가 더 준비되었으면 한다. 이런 마음의 번뇌와 오르내림이 매일을 함께 한다.






나는 이제 30대 중반이고, 20대 때의 나보다는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의 기한이 조금은 늘어난 것 같으면서도, 긴 인생으로 생각했을 때는 여전히 짧기도 하다. 정말 40살이 되면 불혹이 찾아올까? 이제야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철학의 핵심 논제인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도.



최근에 만난 한 분이 20년 전 들었던 질문에 인생이 바뀌셨다고 하셨다.

"ㅇㅇ씨는 일 빼고 어떤 걸로 본인을 설명할 수 있어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순간이 충격적이셨다고 했다. 나 역시도 일 중심적인 사고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 같다. 사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일 빼고도 삶을 구성할 것들이 많은 생명인데.


또, 어떤 경제 강의에서는 이런 얘기도 들었다. 삶의 행복을 높이는 것으로는, '돈과 직결되지 않는 행위를 얼만큼 많이 하느냐'에 달렸다고. 경제를 15년 넘게 공부하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돈은 차후의 것으로. 내 삶에서 내가 돈으로 가치 하지 않는 것들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일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재미를 누리는 행위들.

말 그대로 '좋아서 하는 것'.



그렇지만 아까 고도와 마찬가지로, 이런 마음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돈과 일로 삶을 채우면서, 그에 매몰되지 않게 쉼과 여유도 가져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어려운 것이 인생인가? 다들 어떤 갈등과 흔들림 속에서 자기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는 걸까. 다들 자기만의 우선순위로 삶을 구성한다. 나 역시도 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내 삶을 챙기며 쉬어가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간다.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까. 궁금하다.







연기를 시작할 땐 다양한 삶 속에 들어가는 것들이 너무 재밌었다.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지는 것도,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이 어떤지도. 하지만 요새는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은 뭔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어떤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과거나 미래에 끌려가지 않고 지금의 나. 내가 원하는 것.

연기적으로도, 삶적으로도. 연기 외에도 나를 재밌게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럼과 동시에 살아가면서 취향이 생기고 인생은 더 좁아지기 마련이라서, 여러 책과 경험들로 의도적으로 넓혀가자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고 내가 산 기간은 아직 너무 짧으니까. 아직 나의 삶은 내 삶을 길게 놓고 보았을 때 너무 초반기니까.





다들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나요? 또는, 그렇다면 어떻게 오늘을 살고 싶나요?





나로 먼저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게 될 작품 속의 인물을 연기하고 싶고, 그 속의 삶들에 인간적인 순간들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오늘을 사는 나는, 말 그대로 강해지고 싶다. 체력도 정신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 체력이기에, 열심히 운동해야지 싶다. 그럼과 동시에 마음을 곱게 쓰고 싶고, 마음이 꼬이려고 하면 판판하게 펴고 살고 싶다. 나의 다정을 말로 표현하고 싶고, 연결되고 싶다.

요즘 재밌게 하고 있는 마이즈너 훈련도 꾸준히 하고, 세상을 넓혀갈 영어, 일본어도 애써서 해야지. 나의 삶의 반경을 위해!!!



2025년 12월의 나의 마음은 이렇다.

10년 전의 내가 완전하게 다른 사람이듯, 향후 10년 뒤의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기다리지 말자! 오늘을 살자! 불안을 내보내고, 나를 위해 빳빳한 마음으로 살아!

이 마음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여러 번 말해주는 것이고, 이를 함께 나누어 본다.




<미쓰홍당무>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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