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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hnnap May 14. 2024

〈편지가게 글월〉



175. “곧 돌아올 거다. 그만큼 방황했으면 많이 했지.”


 잘 읽었다. 재밌었다. 담담하고, 쉽게 요약이 안 되는 이런 이야기. 빛을 내는 미시사.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는 편지와 연관된 것이 많은데, 막 그 중 하나가 되었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요약하자면, 영화감독을 꿈꾸던 효영이 연희동에 위치한 편지가게 글월에서 일하면서 겪는 일상 얘기다. 어떤 상처는 단조로이 반복되는 날들을 통해서만 겨우 회복의 실마리가 보인다. 효영은 집안의 기둥이었던 다섯 살 터울의 언니 효민이 사기를 당하고 멀리 떠나버리자 그 여파로 만들고 싶었던 독립영화의 지원금을 포기하고 그 사이 엄마의 건강 악화문제까지 겹치며 복잡한 심경을 느낀다. 효민은 부모님이 아닌 효영의 앞으로만 편지를 보내오고, 그것들을 외면하듯 본가에서 나왔다가 문구샵인 줄 알았던 글월에서 효영은 알바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편지가게라는 것을 알았다면 효영이 거부했을 글월은 그녀의 대학 동문이자 여러 방향전환을 거쳐 마침내 하고픈 것을 찾아낸 선호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는 사정을 자세히 묻지 않고도 효영이 그곳에 스며들 수 있도록 허락한다. 사람을 잘 봐서 효영이 글월에 잘 어울릴 거란 촉이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관련 문구류와 책도 취급하지만 글월의 핵심 아이템은 펜팔 서비스다. 편지를 쓰고 어느 트레이에 넣어둔 뒤, 그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 쓴 편지를 가져가는 것이다. 편지에는 실명 기입이 요구되지 않으며 반드시 가져간 편지에 답장을 해야 할 의무도 없다. 자신이 놓아둔 편지가 어느 누구에게 선택되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 시스템을 통해 서사가 전개되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무척 즐거웠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편지들에서 공감을 얻거나, 뜻밖의 편지로부터 큰 위로를 받는 얼기설기한 구조다. 

 직원인 효영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글월에 다녀간 손님들 중 누구랑 누가 펜팔 서비스로 이어졌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글월의 지향성에 따라 서로에게 펜팔 상대가 누구인지는 함구하는데, 작가가 정보공개의 층위를 설정해 독자는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전부 알게 한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글월 직원으로서 효영이 맡은 역할이 보다 매력적임을 느끼게 한 것에서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끔 모르는 이와의 1:1 오픈채팅에 들어가 아무 말을 하기도 한다. 내 말을 들어준 사람이 있었고 누구냐며 나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을 들어줄 때조차 난 급하게 마무리를 짓고는 했다.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뭘 더 끄집어내야하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편지는 물성을 가지고서 보다 넓은 간격을 허용한다는 게 좋다. 물리적으로 처분의 재량이 주어지고 상대의 미래를 좀 더 내다보게 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하고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릴 것이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한다.

 글월 같은 곳에서 쓰려고 난 지갑에 소량의 현금을 소지하고 다닌다. 책의 등장인물은 모두 편지를 쓰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하지만 내가 일기를 쓰던 때에 난 그저 나를 통제하기 위해 썼다. 언젠가 글월에 들른다면 펜팔 서비스를 이용해보기를 원한다. 수취인을 기대하지 않는 글을 적고서 그 대가로 가장 사소한 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골라 그곳을 나오고 싶다. 책갈피에 쓴 글은 오래 전 나의 맥락에서 발생해 이전 유투브 계정과 함께 지웠었지만, 효민에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가게글월 #txty #텍스티 #같이읽고싶은이야기 #백승연 #서평단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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