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장 자크 루소의 교육 방법론 - 1. 유아기, 아동기
"소극적으로 가르쳐라"
"침묵으로 가르치라"
교육자로서 루소가 '유아기(출생~5세), 아동기(5~12세)'의 아동에게 취한 태도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루소는 교육은 자연과 사물, 인간의 세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이 세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교육이라고 믿었다. 단, 각 요소들은 최대한 훼손되지 않은 기존의 상태 '자연성'과 '고유성'이 유지된 상태여야 했다. 때문에 이상적 교육에서 각 개체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12세 이전까지의 아동에게서는 특정한 기질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때문에 초기 교육은 가능한 '백지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후 아이가 천부적으로 받은 '자신의 재료'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루소는 <에밀>에서 이 시기를 '침묵을 통한 교육'의 때라고 말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그 자체가 교육이다.
아이들은 출생과 더불어 배움이 시작된다. 단, 루소가 말한 '배움'은 '학습'과는 차이가 존재한다. 갓난아이를 예로 들어보자. 아기들은 말과 들음으로 배우지 않는다. 손으로 만지고, 바라보고, 입에 넣는 등의 '행동'으로 생존의 기술을 터득한다. 갓난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학습은 '행동'과 그로 인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경험이 곧 배움인 것이다.
"아이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대로 느끼게 하라"
루소는 자연 속에 아이들이 있으면, 사람이 애쓰지 않더라도 자연이 알아서 아이들을 훈련시킨다고 생각했다. 자연에서 얻는 즐거움, 만족, 그리고 두려움과 아픔을 통해 아이들은 비로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특별히 자연이 주는 거친 '위기, 위험함'은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된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그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스스로 극복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생존능력을 계발하게 될 것이다. 최대한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아이들에게 선물하라. 거칠고, 정비되지 않아도 좋고, 위험하고 장애물이 즐비해도 관계없다. 그것은 때때로 더 좋은 교육적 장치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행복해야 한다.
'놀이'로 아이를 가르쳐라.
아이들과 물에 적신 솜에다 씨앗을 놓고, 싹을 틔워본 적이 있었다. 물 만 있어도 생명의 뿌리를 뻗은 그 모습이 기특하였다. 더 튼튼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으로 좋은 퇴비를 사 왔다. 퇴비를 흙에 섞은 뒤 옮겨 심어주었는데 며칠 뒤 확인해보니 뿌리가 썩어 죽어있었다. 여린 뿌리에는 물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에 맞지 않은 지나친 양분은 도리어 생명을 해친다.
교육도 매한가지다. 각각의 시기에 맞는 교육이 있다. 부모와 교사, 기성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더 효율적으로 학습하길 원한다. 가장 좋은 방법을 어른들이 고려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기성의 관념을 곧 아이들에게 적용한다. 이것은 설령 그 방향이 옳은 것일지라도 아이들을 해친다. 마치 여린 뿌리의 퇴비 같은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다우면 그것으로 족하다. 즐겁게 뛰어놀고 행복함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그 시기 아이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전부이다. 루소는 이 시기 아이들은 반드시 '행복감'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도 <국가론>이란 그의 저서에서 '아이들을 놀이와 축제로 가르치라' 했다. 아이들은 즐거움과 행복감을 통해 배운 내용을 절대로 잊는 법이 없다.
'배운다는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라.
소위 '학습'을 더디게 시작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빠른 방법이 된다.
사실, 쉽게 얻은 '앎'은 실제 지닌 가치보다 항상 저평가되기 마련이다. 이는 배움 자체에 쉽게 '싫증'을 가지게 만든다. 배우는 것은 흥미로와야 한다. 스스로 알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알아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것에 재미를 알게 되고, 그래서 배움의 과정을 성장하는 내내 포기하지 않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그 아이가 도달할 배움의 차원은 다른 사람을 뛰어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깨닫고 있는가?
'배운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는가?
아이들은 '배움'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싶어 하는가?
벌써 3세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던져진 루소의 질문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