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루소의 질문: ' 올바른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교육'을 위해선 '인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본'에 대한 고민이다. 교육방법을 논하기에 앞서 '교육의 방향', '지향하는 인간상'에 대한 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초 존 듀이를 비롯한 다양한 진보 교육 운동은 이런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 보다 '원형적(prototype)'으로 질문했던 이의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연히 사상적 기원을 마련했던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으로 풀어가는 것이 좋겠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지혜가 충분치도 않고) 같은 연장 선상에서 철학을 정리하고, 논의를 확장했던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의 질문과 주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바로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이다.
간단히 첨언하면, 루소는 오늘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경험 교육(Experiental Learning)' 분야의 사상적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앞서 다루었던 존 듀이와 컬트 한(Kurt Hahn)과 같은 근대 철학자들은 이런 루소의 사상적 기초 위에서 다양한 교육 운동을 펼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소는 1762년 자신의 교육철학을 담은 <에밀>이라는 책을 프랑스에서 발표한다. '지성' 중심의 교육이 주류이던 당시 사회에서 '감각'과 '행동'을 통한 교육을 주장한 루소의 교육이론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라 파리에서는 금서 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루소 생각에 교육이 이루어지는 통로는 '자연'과 '사물', '인간'의 세 요소였다. '자연'과 '사물'은 교육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이를 통한 교육에 집중하고자 했다. 자연스레 루소의 교육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맞닿아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그 자체가 교육이다.
루소는 출생과 더불어 아이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곧 배움이 된다고 말했다. 루소가 말한 '배움'은 '학습'과는 다르다. 지식을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갓난아이를 예로 들어보자. 아기들은 말과 들음으로 배우지 않는다. 손으로 만지고, 바라보고, 입에 넣는 등의 '행동'으로 생존의 기술을 스스로 터득한다. 행동과 감각. 그로 인한 경험, 그 자체가 곧 배움(교육)인 것이다.
"아이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대로 느끼게 하라"
루소는 일상의 '자연'을 아이들이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얻는 즐거움, 만족, 그리고 두려움과 아픔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하고 아름다운 자연만이 좋은 교육재료인 것은 아이다. 자연이 지니는 위험과 어려움은 교육의 '위기'가 되기보다 도리어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되곤 한다.
교육자는 결코 아이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주변 삶을 관찰하며 주변에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루소는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깨닫도록 하라 했지만, 꼭 필요할 때는 최소한의 내용만 가르쳐주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더 많이', '더 자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소리이다. 아무리 좋은 교육내용이라도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 각 때에 맞는 교육이 있는 것이다. 젖을 먹어야 하는 아이는 젖을 먹어야 한다. 식물에게 퇴비가 좋다고 하여도 여린 새순에는 물만으로 족한 것이다.
아이들은 많은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정확하게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감각과 판단력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를 키울 수 있는가?
아이들은 그저 행복하게 뛰어놀면 된다. 이것이 이 시기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전부이다. 감각은 그 자체로 배움이다. 아이들이 이 시기에 느낀 즐거움과 행복감은 이후 성장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 된다.
'배운다는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라.
루소가 '소극적'으로 가르치라 한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배움'에 대한 욕구를 침해하지 않아 야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것 이상을 '많이' 가르치면, '배움'에 대한 흥미가 쉽게 사라진다. 항상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배움의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는 것. 자칫 소극적이고 느리다고 생각했던 이 방법이 최종적으로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루소는 확신했다.
문득 마음속에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과연 오늘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었는가?'
"교육의 목표는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배움이 의미가 있다"
"이웃과 사회에 따뜻한 마음을 품게 하라"
배움의 주체는 청소년들이다
루소는 '소극적' 가르침이라 했지만, 실은 '침묵'이 더 적합할 정도로 가르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소년기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르치라 권했다. 다만, 교육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가르침을 주되, 결코 '배움의 흥미'를 잃게 만들어선 안된다. 배움의 주체가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육자의 역할은 아이들이 그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의욕을 북돋아주는 것이 전부이다.
배움의 목표는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다
교육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력'에 국한되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배움'은 들은 지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확인한 사실'이라고 루소는 주장했다. 때문에 교육에는 반드시 삶의 경험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실험함으로 증명해 내는 것. 그것이 루소가 말한 배움의 과정이었다. 필연적으로 아이들은 많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할 것이지만,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향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판단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의 목표는 많은 사실을 기억 안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명료한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다.
루소가 살았던 18세기 프랑스는 이른바 '주지주의(intellectualism)'라 하여 '지성'의 덕목이 지나치게 강조된 사회였다. 그러나 루소는 기성의 지식을 습득하여 지성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본체가 아님을 확신했다. 도리어 각 사람이 각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개성'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것이 핵심이라 믿었다.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온전한 교육에는 반드시 '삶'과 '경험'이 필요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른가? 수 세기가 지났고,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지만, 18세기 프랑스로부터 우리는 과연 몇 발자국을 걸어온 것일까?
"아이들의 교육은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그 교육은 반드시 삶을 이롭게 해야 한다."
300년 전 루소가 던진 교육에 대한 통찰과 질문은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선채로 내 가슴팍에 다가와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