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 교육도 대안교육도 이상을 '완성'한 교육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20세기 초,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였던 존 듀이는 기성의 교육의 목표를 "어린 세대를 미래 삶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좀 경박스러운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쉽게 말하면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챙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앞서 글에서 언급했던 '직업'과 '지식'교육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듀이의 시절만 하더라도 기성 교육의 목표가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는 세기에 걸쳐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미래 사회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달리하면, 존 듀이 당시에는 교육이 스스로 세운 목표를 잘 감당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존 듀이는 기성 교육을 비판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배움의 과정을 이루어 가고 있던 '사람'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배움'이란 행위를 직접 감당해야 할 대상은 '학생'이다. 그리고 그런 '배움'의 최대 수혜자 역시 '학생'이다. '학생'들은 배움의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성 교육의 틀 속에서 학생들은 전혀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능동적이기보다 '피동적'이었으며, '적극적'으로 배움에 참여하기보다 '순종적'으로 수용할 뿐이었다. 왜였을까? 교육의 목적이 미래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현재의 지식'의 부여에 있었기 때문이다. 듀이는 이런 교육의 현실을 직시했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교육의 과정은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 과정인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능동적인 상호과정인가?
존 듀이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진보교육 운동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존 듀이는 '경험 교육'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방법론'이 아니었다.
짐짓 거창하게 시작했으나 나는 이 자리에서 기성 교육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존 듀이 이후부터 지금까지 진보적 교육 영역에서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던 대안교육에 대하여 설명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정말 공유하고 싶은 것은 교육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존 듀이의 태도 자체이다.
존 듀이는 당시 현실에서는 교육이라는 덩어리가 큰 모순을 가지지 않고 기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육자들이 스스로 설정한 교육의 목표가 성실하게 달성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스스로 반문했기 때문이었다. 존 듀이는 '교육적 이상'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수한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그것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헤짚었고, 파내려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진정한 배움의 과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생을 경험의 과정을 통해 교육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듀이는 '경험 교육(Experiental learning)'에 대한 영역을 개척했고, 확장했다. 하지만, 그는 세세한 교육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에 대해 깊은 고민을 이어갔고,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 나섰던 그였지만 그의 교육론은 '교육의 방법론'까지 다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예시를 찼았고, 다양한 근거도 명시했지만 그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원론'에 머물렀다. 지극히 '사상적'이고, '철학적'이었다.
그는 왜 정확한 방법론을 개발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는 그의 무수한 연구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완벽한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 불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8년 정도 대안 교육단체에서 일을 했었다. 그 시간 동안 여러 대안교육 현장에 있는 교육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교육 영역에서는 인간의 '지성'의 영역을 개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고전 교육, 철학교육, 외국어 교육'에 중점을 두고 교육방법을 개발하고 진행했다. 다른 교육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힘, '공동체성', '인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교육, 노작교육, 신체단련'을 교육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이 두 가지 교육은 방법적으로만 따지자면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교육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 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순수성'이었다. 그들이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비록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르게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은 또한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칠 만큼 강렬한 '교육적 열망'을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세세한 교육의 방법론을 따지고 싶지 않다. 또한 각 이론에 대한 장단점을 살피고 싶지도 않다. 내가 정말 나누고 싶은 것은 존 듀이가 가졌던 '질문, 이상에 대한 열망'이다. 오늘날 교육문제에 크던 작던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구라면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법한 그 질문과 열망 말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쉽게 그 답을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내 고민을 지속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스스로 찾은 답을 '정답'으로 확정 짓고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수정이나 타협은 없다. 그러나 듀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실제로 기능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때 던져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인생 동안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배움은 필연적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때문에 '교육적인 경험'의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듀이는 다음과 같은 답을 찾았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사상적인 답이었다. 이 답을 풀어가는 해답은 아마도 다양하게 찾아질 것이다. 듀이는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 듀이의 이런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의 태도를 나누고 싶다.
오늘 이 순간 교육을 고민하는 우리들은 존 듀이가 품었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가? 끊임없이 반문하고 찾아 나섰던 그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완성'이란 '정지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진실은 결코 오늘의 진실이 되지 못한다.
온전함이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