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8시에 올 테니 아침 먹지 말고 커피만 마시라고 했는데 도저히 배고파 안 되겠어서 바나나 1개, 요구르트 1통을 먹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언제든지 짐을 들고나갈 수 있게 배낭을 꾸리고 기다렸다. 늘 그는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다.
"나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지난번에 미용실 예약시간에 맞춰 갔는데 문이 열려 있지 않은 거 보고는 했던 말이다. 가끔 그를 보면 무섭다. 어쩔 때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어서.
오늘 첫 일정은 시장구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에 갈 일 있으면 전통시장에 꼭 들러보려고 한다. 사실 파는 물건이야 거기서 거기고 딱히 살 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마트와는 다른 생기가 있다. 그가 안내한 곳도 우리나라의 시장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먹거리가 달라서 그런지 고기 관련 점포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불꽃을 먹을 것이다'라고 번역해서 웃었던 랑고스(lángos)를 하나씩 사서 먹었다. 빵 반죽을 내 얼굴만큼 크게 튀겨내 그 위에 샤워크림을 바르고 채칼로 썬 치즈를 토핑으로 얹어 먹는 길거리 음식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치즈 외에도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시킨 랑고스는 내입맛에 조금 짰으나 빵이 무척 부드럽고 샤워크림과 함께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다른 가게에서는 그가 소시지 2개를 사 왔다.
Kolbász('소시지'라는 뜻의 헝가리어) '후루카(hurka)라고 한단다.
생김새도 맛도순대랑 비슷했다. 곧바로 순대를 검색해 그에게 이미지를 보여줬다.
"한국에도 이런 게 있어."
"그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거 먹고 다들 으웩(질색) 하는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흉내를 낸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아침을 먹고 그의 말대로 우린 또 까미노를 걸었다. 가볍게 산책이 아니라 10km정도 강가를 따라 걸어 돌아오는 코스였다. 그러다 내가 조금 앞서 나가자 그가 말했다.
"정신 차려. 오늘은 토요일이야."
걷는 게 꼭 출근 준비하려고 서두르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릴랙스 릴랙스'
빨라지는 발걸음을 중간중간 진정시키지 않으면 급한 성격이 발에도 나타난다.
점심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큰아들의 여자친구까지 초대해서 이탈리안 식당에서 먹었다. 큰아들 커플은 우리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고 입맞춤도 했다.
'얘들아, 동양인 아저씨 이럴 땐 당황스럽단다.'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스레 나만어쩔 줄 몰라했다.
오후엔 대형마트장보기에 따라나섰다. 주말에 한 번씩 장을 본다는데 아그네스가 제품마다 유통기한을 살피고, 동종제품의 가격을 꼼꼼하게 비교하며, 계산할 때 쿠폰으로 할인받는 거까지 마치 한국의 아내를 보는 것처럼 친숙하다.
장보기 마치고 집에 와서 라시는 저녁 바비큐 사전준비를 하고 아그네스는 빨래 등 집안일을 분주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내 얼굴이 보이면 "뭐 마실래요?" "뭐 먹고 싶어요?"라고 자꾸 묻는다. 할머니집에 놀러 온 손주 대하듯.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가 보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헝가리와한국의 50대 아저씨의 삶은 엇비슷해 보였다. 라시가 중간중간 털어놓았던가장의 무거운 두 어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