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여기 다양한 모습을 커밍아웃한 교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르치던 수업으로 기억했던 선생님들도, 교실 안에 다양한 학생들이 있는 것처럼 사실 다양한 삶을 가지고 있다.
- 이윤승 외, '별별 교사들' 중에서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죠?”
“네. ‘@@연구회’로 예약이 되어 있을 거예요.”
“아, 복실(福室)이에요.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종업원이 안내한 곳으로 가니 누가 봐도 '예약석'임을 알 수 있듯이 테이블 위에 손님 맞을 기본적인 세팅이 다 되어 있었다. 열 명이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가운데 구멍 뚫린 곳에 발을 내려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든 방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과연 누가 가장 먼저 도착할까? 이 모임의 총무이자 실질적으로 20년째 모임을 이끄는 J일까? 아니면 집이 가장 가까운 L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으니 바로 H였다. 현재 모임에 나오고 있는 (매달 2만 원의 회비를 내는) 회원 중에 유일한 60년대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 뒤에 ‘형님’을 붙여서 그를 부른다. 그런데 H는 20년을 넘게 만나도 대하기가 서먹하다. 그가 꼭 아내의 고등학교 은사라서 그런 것은 아닌데 뭔가 결이 다른 느낌이랄까. 무슨 말로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나 생각하다가 의례적인 인사치레로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먼저 물었다. 그런데 H에게서 나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 명퇴했어.”
“정말요? 언제 하셨어요?”
“올해 2월에.”
이 소식이 낯선 것은 들었던 기억을 잊어서일까? 아니면 그에게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갑자기 명퇴한 삶에 대해 궁금함이 몰아쳤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사가 됐든 관리자가 됐든 주어진 정년을 채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는데 올해 급격하게 떨어진 체력, 교권 침해와 악성 민원으로 유명을 달리한 여러 교사를 보며 ‘과연 이런 사회에서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 만난 첫 번째 명퇴 교사가 H였다.
“그럼,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그만두고 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어, 일부러. 잠은 일찍 깨는 데 그냥 멍하니 있어. 그러다 배고프면 밥 먹고 안 고프면 건너뛰고. 졸리면 자고.”
“명퇴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야. 원래는 정년까지 하려고 했지. 근데 1년 전부터 너무 힘들더라고. 알잖아? 수학은 완전히 갈려. 상위 몇 명 빼고는 전혀 안 들어. 그래서 한 1년 고민하다가 정년 1년 반 앞두고 그만뒀지.”
“학교 생각은 전혀 안 나세요?”
“응. 전혀”
6개월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더니 이제 슬슬 심심함이 몰려와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란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참 어정쩡한 나이라고 했다. 어느 모임은 동호인들 나이대가 많아서 가면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 거 같고, 어느 모임은 팔팔한 젊은이들이 주를 이뤄서 노인네 취급받을 거 같아서, 근처 산에 가끔 오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H의 얘기를 듣던 중 G가 고개를 쑥 내밀고 들어온다.
그는 현재 시흥에서 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이하 진로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가 가장 먼저 관리자가 될 것이라 예상을 했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고 세상 돌아가는 거에 무척 빨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리자의 길을 포기하고 ‘진로교사’의 길을 선택해서 우리를 적이 당황스럽게 했다.
“지금 내 삶이 관리자보다 훨씬 질이 좋다고 생각해. 근데 내가 왜 관리자를 해.”
충분히 교감 자격연수를 받을 수 있는 점수일 텐데 왜 서류제출을 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때 그의 왼쪽 팔에 세공비가 많이 들어갔을 법한 반짝이는 굵은 금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터지고 실내 운동을 못 하게 되면서 나처럼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었어. 그래서 자전거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갔지. 그때 리셀링을 해서 좀 벌었어. 하하하”
“리셀링?”
“응. 중고 자전거를 사서 웃돈 붙여서 파는 거야. 그동안 거래한 자전거가 20대는 족히 넘을걸. 한때는 우리 집 거실에 판매하려고 사둔 중고 자전거가 6대 정도씩은 고정적으로 있었다니까. 근데 코로나가 끝나면서 자전거 인기가 시들해져 이젠 산 가격 그대로 다 팔아 버렸어. 그거 겨우 다 처분하고 나서 바로 금으로 돌아섰지.”
“금? 골드?”
“응. 어느 날 기사를 보니까 금은 절대 안 떨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당근 마켓이나 중고나라 카페에 올라온 금을 조금씩 사 모으고 있어.”
그의 이야기는 늘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어 무척 낯설기도 하지만 입담이 좋고 풍이 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듣게 된다. 그 무용담에 빠져 듣고 있는데 총무이자 우리 모임을 20년째 유지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 J가 도착했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교감이 되었으며 다음 주엔 교원대학교로 ‘교장 자격연수’를 7주간 받으러 떠난다고 한다. 그가 교감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학교 앞에 걸어줬다는 현수막이 지금도 무척 인상 깊게 남아 있다.
'J교감 선생님은 다정다감하시고 마음이 여리십니다^^;; 교직원 및 학생, 학부모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 J샘을 사랑하는 J샘패밀리 아해들 일동
J는 평소 제자들 챙기길 가장 잘하는 교사다. 수년간 고3 담임을 하면서 매년 반 아이들과 졸업 후에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반 모임을 하다가 어느 순간 J의 주선으로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든 게 ‘J샘패밀리’이다. 그런 그가 현재 고등학교 교감으로서 교장과 교사 사이에 끼여 겪는 고충을 입에 거품을 품고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이야기하고 있을 즈음에 L이 들어왔다.
L은 30대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하더니 40대 초반에 백발이 되었다. 최근에 염색했는지 흑발이 되어 나타난 L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타고난 몸이 약해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지쳐 떨어지지만, 모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성실한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G보다 2년 먼저 ‘진로교사’로 본인의 진로를 바꾸었다.
“요즘 애들을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가끔 영어 시험문제 보고 학부모가 전화해서 따지는 것도 진저리가 났고.”
진로교사가 된 연유에 관해서 물었을 때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했던 말이다. 아마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영어를 가르치며 받은 스트레스가 여간 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본다. 그런 L이 가끔 메신저를 통해 자료를 보내줬다. 큰아들 입시 준비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며. 대학에 대해서는 아빠보다 더 관심과 열정이 없어보이는 큰아들이기에 결국 한 번도 L이 보낸 자료를 전해주지는 않았지만, 매번 새로운 자료가 생길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경기도 교육청 장학사인 W와 올해 포천에 신규교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는 C가 엇비슷하게 도착해 빈자리를 채웠다. W는 그사이에 더 말라 마른 장작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장학사의 삶이 어떤지 대강 들어서 알기에 더 안쓰러웠다. C는 관리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뒤에 식구들과 함께 지역 점수가 있는 포천으로 아예 이사를 해버렸다. 모임 장소인 안양과 워낙 떨어져 있기도 하고, 대부분 금요일 저녁에 모임을 하게 되다 보니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그동안 거의 참석을 못 했었다. 같이 근무할 때 그는 까만 피부에 선이 굵은 얼굴의 체육 교사였는데 뽀얗게 변한 얼굴이 낯설어서 농담으로 인사를 건넸다.
“교사들이 교감실에 가둬놓고 나오지 말래?”
그가 소맥을 들이키며 들려주는 얘기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4년 사이에 교감이 세 번이나 바뀔 정도로 피곤한 교장을 자기가 모시고 있단다. 그 얘기를 들으니 햇빛을 자주 못 봐서가 아니라 교장 비유 맞추느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다녀오느라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한 D를 끝으로 올 사람은 다 왔다. 원래 오기로 했던 N은 안 와서 전화했더니 받지는 않고 ‘오늘 갑작스럽게 못 갈 형편이 되었다’라며 톡을 남겼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보다.
2004년에 고3 담임을 함께 했던 우리, 2005년부터 모임을 만들었다. 첫 모임 장소였던 식당에 예약하려는데 단체 이름이 뭔가 좀 있어 보여야 할 거 같아서 N이 학교가 있던 동(洞) 이름에 ‘연구회’를 붙여서 급조한 ‘@@연구회’가 우리 모임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 14명의 고3 담임 중에 여교사였던 2명과 학년 부장을 제외하고 12명 모두가 참여했다. 그러다 중간에 가장 나이가 많은 K가 개인 사정으로 먼저 탈퇴했고, 대학 교수가 된 O는 몇 년 회비를 안 내더니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그렇게 남은 10명 중 선약 때문에 빠진 S를 제외한 9명이 오늘 모이기로 했는데 갑작스럽게 N이 못 나오게 되면서 8명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그동안은 퇴근하고 가기에 시간이 빠듯해 차를 가지고 가서 술도 마시지 않고 저녁만 먹고 먼저 나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토요일에 만나 여유롭게 지하철을 타고 가서 마음 편히 2차까지 함께 했다. 매번 먼저 나오느라 잘 몰랐던 내용까지 이번에는 2차에서 깊이 들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20년 후에 이렇게 변해 있을 거를 만약 20년 전에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가족과 생이별하며 먼 벽지로 몇 년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돼. 20년 후엔 관리자를 희망하는 교사가 크게 줄어 고생하지 않고도 될 수 있다네.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며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M자 탈모가 되기 전에 진로를 바꿔보는 거는 어때?
정년 퇴임 전에 학교를 그만둘 수도 있으니 미리 노년의 삶에 대해 준비를 해보는 거는 어떤가요?
도 교육청 문화나 업무시스템이 당신과 잘 맞는지 장학사 시험 준비하기 전에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
그렇다면 20년 전의 내게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중학교 부적응 교사’가 되어 야반도주하듯 떠난 중학교로 언젠가 다시 가게 될 거야. 그러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과 마찰 없이 잘 사는 법을 미리 익혀둬.
교직에서 20년을 넘게 보냈는데 내게 해줄 말이 고작 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니 참 허무하다. 영화나 소설처럼 시간을 되돌려 20년 전과 똑같은 상황을 다시 맞이한다면 그때는 뭔가 거창한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교직을 떠나 인생에 큰 가르침이 되는 그런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