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 도밍고 ~ 비암비스티아 : 29.3km
잠결에 종소리가 들려와서 세어 보았다. 분침이 15분을 가리키면 한 번, 30분에 두 번, 이렇게 15분 간격으로 타종을 해서 정각에 네 번의 타종을 했다. 출발 준비를 위해 일어나니 정각을 알리는 타종과 더불어 5시를 알리는 다섯 번의 타종이 이어졌다.
우리 방에서는 나처럼 일찍 출발하는 사람이 없는지 조용하다. 그 고요함을 뚫고 하나하나 짐을 챙겨 나왔다. 출발 전에 아침을 간단히 먹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와 어제 사 놓은 천도복숭아와 딸기 요거트 한 병으로 아침 끼니를 해결했다.
출발하기 전에 함께 걸었던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라치에게 갔다. 보통 이 시간이면 라치는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한다. 예상대로 라치는 일어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 지금 가. 나중에 또 만나. 그리고 (자고 있어 깨울 수가 없어서)볼라쉬와 아그네스에게도 내가 먼저 갔다고 전해줘.”
“잘 가.”
라치의 인사를 뒤로 하고 얇은 바람막이 사이로 찬기가 스며드는 어두운 길에 나서니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산토도밍고 시내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 있어서 까미노 표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휴대폰 손전등을 켜서 보는데도 까미노 표식이 잘 안 보였다. 그래도 대강 어느 쪽 방향인지 아는 지라 길 따라 걷다가 30분쯤 됐을 때 갈림길이 나왔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구글 지도앱을 켜서 그 안내에 따라 가려고 보니 이미 까미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순례길을 만나는데 까지는 구글 지도에서 안내하는 대로 가려고 했는데 가다보니 하마터면 고속도로로 올라갈 뻔 했다. 다행히 고속도로를 따라 나 있는 농로를 찾아서 걸었다. 5km 정도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와서야 마침내 노란 화살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걸은 시간이 한 시간 반은 되었다.
바르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인도네시아에서 20년 정도 사업을 한 50대 초반의 L을 만나 동행을 하게 됐다. 현지에 3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그는 2년 전에 간과 폐가 안 좋다는 진단을 받고 그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을 하다 보니 쉽게 떠날 수가 없어 미루다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모든 사업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이곳으로 떠나왔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업가의 기질 때문인지 순례자들이 사서 들고 다니는 지팡이(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나무 지팡이를 사용함)를 인도네시아의 질 좋고 저렴한 원목으로 만들어 까미노에서 판매할 사업 구상을 하고 있었다.
큰 마을인 벨로라도Belorado를 지나 7km 정도 떨어진 비얌비스티아Villambistia로 숙소를 정했다. 여기까지가 산토도밍고에서 약 30km 지점이기 때문이다. 침대가 14개 있는 작은 알베르게로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가게이자 숙소다. 약간 투박한 주인아주머니 때문에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불친절한 숙소로 알려져 있다고 하나 오늘 하루 보내보니 나름 정이 있고 유머도 지닌 털털한 분이셨다. 저녁은 주인아주머니께서 직접 만든 샐러드와 커리 느낌이 나는 닭고기 요리였는데 함께 저녁을 먹은 사람들이 모두 만족스러워 했다.
9명이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스페인 까탈루냐에서 오신 할아버지 두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 온 사람들이었다. 네덜란드 할아버지, 독일의 중년 남녀, 프랑스 중년 부인, 이탈리아 중년 부인과 L. 여러 나라에서 왔는데도 식사 시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까탈루냐 할아버지는 표정과 말투가 마치 개그맨과 같아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그 할아버지가 유리 주전자로 포도주 마시는 시범을 보이며 다들 한 번씩 해보라고 해서 내가 먼저 도전을 했다. 우리가 어려서 주전자에 물 담아 마시면서 많이 해본 장난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동양인이 그걸 해내니 신기한 듯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런 소소한 재미가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에는 있었다. 내일도 큰 도시인 부르고스Burgos 앞마을까지 가려고 한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이 생길지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