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걷기18일차:살짝 정도에서 벗어나기

산 마틴 델 까미노 ~ 무리아스 데 리치발도 : 28.7km

by 까미노

어제 잔 숙소는 특이하게 6시 전에 일어나지 말라고 써 붙어 있었다. 나처럼 5시부터 출발하려고 일찍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느지막이 길을 나서려는 사람들의 새벽 단잠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나 일찍 출발하려는 사람에게는 본의 아니게 1시간이나 늦게 나섬으로 인해 한낮 뙤약볕에 한 시간 정도를 더 노출하며 걷게 되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주인의 영업 방침이니 어쩔 수 없이 1시간 정도를 침대에서 더 뭉개다가 짐을 챙겨 나왔다. 처음엔 고속도로를 끼고 계속 길이 이어져 쌩쌩 달리는 소리에 순례길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는데 중간 지점부터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과 들판을 가로질러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는 본연(?)의 까미노가 펼쳐졌다.


순례길은 아무래도 흙길을 걸어야 제맛이 난다.


중간에 아스토르가Astorga를 지났는데 레온보다는 작지만 우리나라의 읍내 정도 되는 큰 마을이었다. 그 마을 초입에서 학군단으로 복무하다 제대하고 나서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한국 청년을 만났다. 대개 처음 만남에서는 이름을 잘 안 물어봐 이름은 모르나 그는 제대 후 가족여행으로 유럽에 왔다가 가족들은 귀국하고 자신은 남아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하루에 30km 걷는 게 너무 힘들단다.


그래서 같이 걷는 외국인 친구들보다 1시간 먼저 나서는데 매번 중간에 따라 잡힌다는 것이다. 그 외국친구들 중에는 여자도 있는데 어찌나 잘 걷는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제 새벽까지 술 먹고 늦잠 자는 외국 친구들을 남겨두고 먼저 나섰는데 아스토르가 대성당 앞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다음 마을인 무리아스 데 리치발도Murias de Rechivaldo까지 4km 정도를 더 가야 해서 그 청년과 아스토르가 대성당 근처까지 함께 걷고는 헤어졌다.


오늘의 숙소가 있는 무리아스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리’에 속한 어느 동네쯤이다. 동네를 돌아보니 빈집도 많고 순례자가 지나가지 않는다면 마을이 없어지거나 노인 몇 분만 겨우 살고 있을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텅 빈 놀이터엔 아이들이 언제 뛰어놀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가 3개나 있고, 작은 호텔(거의 호스텔 수준)도 있다. 사람 북적이는 도시 같은 곳보다는 이런 작은 시골마을이 더 좋아 일부러 4km를 더 걸어서 왔다. 이곳은 마트도 없고 식당도 문 연 곳이 한 곳 뿐이라 무엇을 사고자 하거나 먹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조용히 내 시간을 갖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호스피탈레로가 순례자를 맞이하기 위해 침구를 정리하고 있다.


오늘 숙소는 그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곳으로 정했다. 어제 숙소가 그동안 머물렀던 곳 중에서 최고의 시설을 갖춘 호스텔이었다면 오늘은 딱 필요한 것만 아주 소박하게 갖춘 공립 알베르게다. 숙박료도 5유로로 어제의 절반이다. 침대는 14개뿐인데 8개는 단층침대, 3개(6베드)는 2층 침대다. 겨울엔 온수가 제공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초가을인 지금은 샤워실에 따뜻한 물이 아주 잘 나온다. 샤워부스도 별도로 있지 않고 화장실 한편에 있다. 물론 화장실도 남녀 각각 1개씩만 있다. 마당에 빨래를 할 수 있는 수도꼭지가 두개 있고 빨랫줄이 사람 수에 비해서는 꽤 여러 줄 쳐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숙소에는 별로 없거나 아예 없는 빨래집게가 상당히 많이 빨랫줄에 달려 있어서 오늘은 가져간 옷핀을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알베르게가 있다면 난 무조건 0순위로 그곳을 택할 것이다. 머무는 사람들도 이런 숙소 분위기 탓인지 다들 조용해서 서로 친해지기는 힘들겠다. 그래도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더 반갑지 않을까.


새벽에 출발하려고 나오니 문 앞에 호스피탈레로가 준비해 둔 음식(요플레, 사과)이 놓여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걷기17일차:모범답안이 없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