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그었지만, 인연은 남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백 번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일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마음은 상했는데.
늘 이랬다. 감정이 앞서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뒤늦게 후회하며 이불킥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날은 둘째의 초등학교 3학년 종업식 날이었다. 집에 오니 아내 얼굴에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말수가 적은 아내는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이가 반 아이한테 맞아서 몸에 멍이 잔뜩 들었어. 그런데 내년에 그 아이랑 또 같은 반이 되었대.”
“진짜?”
종업식 날, 다음 학년 반 편성이 임시로 발표됐나 보다. 나는 둘째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웃옷을 걷게 했다. 푸르스름한 멍부터, 시간이 꽤 흘러 흔적만 남은 옅은 멍까지 다양한 색의 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친구한테 맞았어?”
원래도 눈물이 많은 둘째는 방에 들어올 때부터 글썽이더니, 이내 두 줄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쳐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게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누가 그랬어?”
“**이가 때렸어.”
“왜?”
“장난이라면서 자꾸 밀치고 때리고 그래...”
이건 분명 학폭이었다. 몇 해 동안 학생부장을 맡으며 수도 없이 다뤘던 그 전형적인 모습—힘이 센 아이가 힘이 약한 아이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그런데 그런 일을 내 아이가 겪고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아내에게 상황을 묻고,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 아버지입니다. 아이가 친구에게 맞아 몸에 멍이 가득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혹시 이런 상황을 알고 계셨는지요?”
선생님도 놀란 듯했다. 둘째가 이런 문제로 도움을 청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나는 둘째에게 들은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학폭으로 정식 신고를 넣고 강력히 대응하고 싶었지만, 이미 종업식이 끝난 뒤였다. 괜한 소란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담임은 나보다 현명했다. 내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고, 둘째를 때렸다는 아이의 이야기도 들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그 아이가 맞다고 인정했다고 했다. 울기도 했단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자신은 ‘장난’이라 생각했기에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지 몰랐다고. 선생님은 임시 배정된 반을 공식 발표 전에 조정해, 둘째가 그 아이와 다른 반이 되도록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사건은 정리되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둘째는 주말마다 친구와 코인노래방에 간다. 급식이 없는 날이면 함께 점심을 먹고, 수련회 전에 같이 옷을 사러 가고, 영화를 보고, 가끔은 친구 집에 들러 라면도 끓여 먹는다. 어느 날은 새벽까지 통화하며 수다를 떨다 혼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걸 한 친구랑만 한다. 놀랍게도, 그 친구가 바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둘째를 때렸던 아이다.
“아빠, 그때 왜 그랬어? 아빠가 괜히 반 바꿔 달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알아?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
와… 진짜 억울해서 미칠 뻔했다. 그날 둘째와 나눈 대화를 녹음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 싶다. 분명히 둘째의 의사를 물은 뒤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이제 와서 아빠가 성급해서 단짝 친구를 잃을 뻔했다니, 참 기가 막히다.
'내가 선을 넘은 것인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감정대로 바로 나서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참아야 할지— 반백 년을 살아도 그 선은 여전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