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고스 ~ 혼타나스 : 31.1km
이**씨와 길을 나서기 전에는 분명 어제 무리해서 많이 걸었으니 오늘은 20km 정도만 걷고 일찍 쉬자고 했다. 우린 서로 걷는 속도가 다르고 쉼의 스타일도 다르니 목적지에서 만나자고 했다. 난 더운데 걷기 싫고 어제처럼 숙박 장소를 찾아 헤매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다보니 약속했던 20km 지점에 11시가 조금 넘어 도착해 버렸다. 아직 시간도 일러서 공립 알베르게는 투숙객도 받지 않는데다 걷는 것을 끝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씨에게 27km 지점에 있는 산볼Sanbol까지 가겠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부지런히 걸었다. 갈수록 뒷목에 느껴지는 강한 햇살과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안고 정말 부지런히 걸었다.
내 걸음 속도를 재어보니 평균 시속 5km 정도 되는 거 같다. 그렇다면 7km는 1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달하는 곳인데 그 시간이 되도록 걸었는데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 숙소가 1개뿐이며 그 숙소마저도 침대가 12개밖에 안 되는 작은 곳이라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을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걷다 보니 31km 지점에 있는 온타나스Hontanas까지 와버렸다. 이건 일반적인 사람들이 걷는 하루 코스다. 어쩌다 오늘도 30km를 넘게 걷고 만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산볼 마을은 까미노에서 2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숙박하는 알베르게를 제외하고는 마을 주민이 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 평소처럼 마을 안에 있는 알베르게를 생각하며 걸었던 내 눈에 안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지난 번 먼저 떠나간 폴란드 친구 에디타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미사를 보고 나오다 성당 앞 그늘 진 벤치에서 여행기를 적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오늘 숙소가 달라서 저녁 먹기 전에 잠시 얘기를 나누고는 헤어졌는데 내일은 걷다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배움과 돌봄이 살아 있는 마을공동체 평화학교'
2013년 광수중학교의 교육비전이다. 학교혁신부장을 맡은 내게 '마을학교'관련 업무도 주어졌다. 당시 분위기로는 뭔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업무가 있으면 거의 대부분 '학교혁신부'가 맡았다. 혁신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담기에 가장 적합했나 보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마을학교'업무는 정말 생소했다.
처음엔 '요즘도 마을이 있는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껏해야 '마을'이라는 단어는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 아파트의 벽면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광수중학교에 와서 마을이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을교육 공동체'를 표방하고 있으니 일단 학교밖으로 나가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마을의 4개 학교 관계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는데 이를 '마을학교 연석회의'라고 불렀다. 광수중학교가 있는 퇴촌면, 그리고 인접한 남종면의 공립학교인 도수초, 분원초, 광수중과 퇴촌면에 자리한 대안학교인 푸른숲발도로프학교의 담당자들이 모였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크게 함께 할 이유가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안학교의 교육과정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딱히 같이 공유할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두 초등학교는 중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찾아와 문제를 일으켜 어떻게 하면 중학교와 연결되는 것을 꺼려했고, 공교육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대안학교 역시 그동안 자립해서 잘 운영하고 있는데 왜 굳이 '마을학교'라는 이름으로 묶여야 하나 싶은지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첫 만남은 그랬지만 우리는 어찌 되었든 학교마다 돌아가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대안학교를 방문해 보기도 했다. 푸른숲학교는 퇴촌면의 산 비탈에 있는 학교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공립학교에서는 하기 힘든 교육과정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 관심이 갔다.
두 곳의 초등학교도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좀 더 알게 되니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학교 규모가 중간급인 도수초는 학교장의 수직적인 리더십, 교직원 간의 갈등, 학부모의 민원 등 일반적인 초등학교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데 분원초는 전체 6학급의 매우 작은 학교라서 그런지 교육과정도 대안학교의 성격적인 부분도 있었고, 교직원의 관계가 끈끈했다. 그리고 학부모도 일부러 도시에서 농촌으로 작은 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도 있어서 학교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학생수가 줄어 농촌의 초등학교가 겪는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학교 경영의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우려와는 다르게 만나면서 이런 현실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을 위로해 주는 것으로도 큰 힘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비로소 '퇴촌남종청소년영화제'를 기획하게 되었다. 한국평화교육훈련원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는데 네 학교의 아이들이 각자 영상을 만들어 축제 기간 동안 상영을 했다.
그 다음해에도 영화제는 이어졌지만 그게 끝이었다. 2014년부터 학생부장으로 업무가 바뀌면서 마을학교 업무도 내 손을 떠나서 더이상 관여를 하지 못했는데 몇 해가 지나서 보니 예전에 정기적으로 모였던 마을학교 연석회의는 없어져 버렸다.
경기도교육청은 이재정 교육감 취임 이후에 더 마을학교, 꿈의학교를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키운다'는 얘기는 그냥 아프리카 속담일 뿐이지 지금에도 적용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의 존재와 마을의 역할이 있으면 좋겠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나혼자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마을까지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쓰기가 쉽지는 않다. 각자도생으로 살아가는 지금 시대에 마을은 도대체 어떻게 복원하고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지 여전히 내게는 확실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