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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Nov 17. 2022

시끄러운 밤은 싫어

시끄러운 맘은 싫어.


    졸린 밤을 겨우 이겨낸 새벽 4시. 평소보다 더욱 일찍 걷기로 한다. 미리 챙겨둔 짐을 꾸려서 나와보니 바깥은 미처 깨지 못한 동물들의 숨소리와 진작 깨어난 동물들의 울음소리뿐이다. 그 사이에 선 나는 울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 그냥 걷기로 한다. 헤드랜턴을 질끈 묶고 그래, 오늘은 70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야 하니까.


    박준 시인의 시집이 있는 숙소였다. 순례자 틈에선 책을 들고 오는 게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치부받곤 했다. 매일 무리하여 걷는 게 일이다 보니 종이책은 고작 짐이 될 뿐이라고, 그래서 여태 지나온 숙소에는 제각기의 언어로 쓰인 책들이 중구난방 놓여 있었다. 난 두 권의 책을 들고 왔는데도 하루도 꺼내지 않은 적 없이 매일 손 끝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힘이 되기도 슬픔이 되기도 하는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 시집을 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끝의 시작이 될 동네에 이르러 이 책을 두고 간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짐이 되었기에 이마저 두고 갔을까. 아님 다 읽었으니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하여 마음 씀씀이를 부렸나. 나는 책을 고이 챙겨 이 길의 끝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침밥을 먹는 건 호사였다. 해는 아직 멀었으니 식사는 한참 걸리겠지. 어두운 숲은 춥고 두렵다. 사나운 동물의 소리가 들려오니 머리가 쭈뼛선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 나는 미지의 동물로부터 획득하는 공포보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이 더욱 두렵다. 그래서 3일이 걸리는 거리를 끝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실은 어떤 일에서나 끝이 보일 때 이상한 힘이 솟아 흐르곤 했다. 더 이상 못 하겠다는 마음이 들더라도 끝이 선명하게 보이면 그 순간부터 끝이 날 때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이상한 괴로움.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심지어 잠을 거른 채 마무리를 짓기 위해 매달렸다. 아무래도 시끄러운 맘이 싫은 탓이겠지. 고작 며칠을 더 견디면 될 테지만 난 수많은 상념에 흩어지리라. 이미 얻은 마음마저 으스러져 울어버리리라. 이번엔 다른 방식의 결과를 맞이하고 싶었다. 몸의 힘듦과 체력의 소진으로 모든 생각이 불타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든든히 먹으며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많아지는 순례자들은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지독하게 물어왔다. 하루 만에 가능한 거리냐고, 그렇게 멀리 걷는 이유가 뭐냐고. 이윽고 오후. 시간 상 응당 오늘의 목적지가 되어야만 할 도시에서 모두가 머물 숙소로 사라지고 고요한 숲으로 진입한다. 이제 마을과 마을 사이 마지막 구간입니다. 그리고 이 길만큼은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걸을 수 있을 터. 황혼으로 하늘이 붉어온다.


    종소리가 들려요. 이제 이 기나긴 반복도 오늘로 종료됩니다. 도착하자마자 하루치의 빨래를 빨고, 바쁘게 재료를 준비해서 식사를 하고, 내일의 목적지를 살펴보지 않아도 되며, 그 와중에 책을 짧게 읽다가 잠들어버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광장에는 아무도 없다.



    대성당 앞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이 시간에 배낭을 들고 도착한 사람이 나뿐이어서 나는 누구와도 함께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 불과 5년 전에 걸었던 순례길이 다시금 도착했다고 하여 큰 의미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냥 아주 시원한 생맥주를 맛있게 먹고 싶었다고 대답하면 어처구니없어하려나. 며칠 남지 않은 여정에서 진작 축배를 들던 어젯밤의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 잔뜩 취했어도 될까. 그러나 그건 너무도 싫었어요. 이제 미처 잊고 있던 통증이, 발과 다리가 웅웅 울리고 있다. 가져온 시집은 마지막 공립 숙소에 갖다 두면 되겠지. 너도 이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내일의 알람은 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무리해서 먼 거리를 걸었나요. 아마도 시끄러운 밤이 싫은 탓이었겠죠.






@b__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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