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km.
여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 걸으면 0km라고 적힌 지점이 나온대. 현실의 이스터 에그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다 끝에서 우린 모든 걸 태워버릴 거야.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모서리에 도달해서 순례자 증서를 불태워버린다. 이건 의미가 없어. 사람이 뜸한 거리를 걷다가 좋아하던 술을 발견하고 병 째 샀다. 독한 럼주가 식도를 태우며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은 다윗 왕이 반지에 새길 문구를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물었을 때의 대답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고통만을 떠올리며 거 참 현명한 사람일세. 따위의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이나 슬픔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는 건 먼 훗날의 몫이 됐다. 영광, 좋은 일 역시 마찬가지로 지나갈 테니 늘 겸손하라는 의미도 있는 거다. 그렇다면 과연 다윗은 생의 기쁨을 먼저 떠올리며 겸손했을지, 슬픔을 떠올리며 위로를 얻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자명한 사실은 현대의 인간들에게 위안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걸 보면.
길은 내게 슬픔이었나, 혹은 기쁨이 됐나. 걷는다는 행위는 어딘가에 잠시라도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안다. 어딘가에 머물 수 없으면 배회할 뿐이다. 목적이 불투명하다는 게 걷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불투명하기 위해 걷는 건 이유가 될 수도 있으리라. 배회자는 단호해져서 곧장 감정을 놓는다거나 살피지 않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버려둔 감정을 더듬는 일 말곤 못 한다. 그럼 영영 회상을 위해 배회하고만 싶다.
어딘가를 지나며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이 잠시 빛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빛을 따라 걷는다. 그러나 빛은 너무나 올곧아서 해진 뒤의 가로등처럼 기둥 아래 가장 빛난 부분을 지나치고 난 후로는 점점 어두워진다. 다음 가로등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 있으면 안전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안다. 인간의 사랑은 잠시 잠깐 빛날 뿐이라고. 그 순간과 겹쳐지던 영광을 그렇게 느끼려면 지나쳐야만 한다고.
더 이상 걷는 길이 없다는 표식 앞에서 앞은 어디인가 살펴본다. 좌우도 북과 남도 모두 걸을 수 없는 바다, 여기까지가 안전지대요 하는 파도가 일렁인다. 그 끝까지 뛰어들 용기는 내게 없어서 불을 지펴 가져온 것들을 태운다. 남는 건 기억뿐이래요. 걸었다는 시간은 결코 길에 남는 법이 없다. 증명서도 도장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작 하루의 차이일지라도, 아니 반나절의 차이였을지라도 만났던 빛은 달랐을 테니. 그래서 그 순간뿐이다. 힘들었던 고통은 휘발되고 빛을 쬐던 잠깐만 남는다. 그리고 이제와 기억을 더듬어 그날의 온기를 적어둔다.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을.
@b__a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