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마지막 글은 기고글 재탕..
회현동의 멋진 복합공간 Piknic 과 아산나눔재단에서 함께 준비한 #회사만들기 라는 전시가 있다. 전시 도록에 포함될 글을 쓰게 되었고 아래의 글이 그 초안. 아직 도록을 확인하진 못했는데, 내 글도 엄청 더 멋지게 다듬어져 있을 것 같다. 쓰다보니 좀 건방지게 쓰게된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좀 나아지니 꼭 끝까지 읽어주시고, 2023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러나,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세요
회사 만들기, 로맨스와 리얼리티 그 사이
창업을 하려는 마음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마는, 아무래도 저의 이유가 가장 쩨쩨하고 덜 로맨틱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십 수년 전,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는데요, 명분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친구가 같이 회사 만들자고 꼬시기에 이건 정말 좋은 명분이다 생각이 들었어요. '왜 창업을 결심했나요?' 라는 질문에 이 대답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어요. 멋도 없고 김 빠지게 하는 대답 같아서요. 음, 여러분에게만 살짝 고백해봅니다.
저의 이유가 시시해서였는진 몰라도, 저는 초심이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거창하고 숭고한 이유들을 가져다 붙일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 이유 아닐까요. 5년 전 Piknic 을 만든 김범상대표님도, 지금의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회장님도 그 최초의 마음은 거기서부터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지금 막 창업을 하셨나요? 부럽습니다. 앞으로의 긴 여정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우리를 어디든 데려갈 배가 막 준비되었고, 나와 뜻을 함께하려는 동료들이 옆에 있습니다. 내가 내딛는 이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이고,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린 정.말.로. 열심히 할 거니까요.
응원합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 절반은 3년 내에 망하겠지만요. 5년 뒤엔 생존확률 30%가 되고요. 죄송하지만, 통계가.
저는 창업자들에게 투자하는 일을 10년 째 해오고 있습니다. 매 일, 매 주, 매 달 창업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검토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100명의 창업자를 만나면 그 중 한 두 개의 회사에 투자를 하고요. 가만보자, 일 년에 8-10곳 정도 투자를 하고 있고, 이 일을 한 지 9년하고도 5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니까… 어림잡아 1만 명 정도의 창업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창업가들은 제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단연코 가장 똑똑하고 열정적이며 게다가 지독하게 집요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 데에도 생존 확률이 3년 내 절반이 채 안됩니다. ‘성공확률'이 아니라 생존확률 입니다. 그러니까, 살아'는' 있을 확률 입니다. 그 여정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정말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싶습니다. 저에게까지 그 고통이 전염되어 힘들 때가 있으니까요. 창업자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무거운 바위를 계속해서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리는 무한 반복의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 같기도 합니다. ‘나는 그냥 이태원에서 8평짜리 작은 가게 하려는 거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아닌데 뭘 이렇게나 겁을 줘..’ 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으세요. 회사의 크기와 상관없이 반드시 겪게 될 일들입니다.
제 머릿속에 입력된 1만 명 창업자의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회사를 이제 막 시작한 여러분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일들을 살짝 예측해보겠습니다.
항해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감정상태는 매우 자주 롤러코스터가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롤러코스터는 직장동료도, 심지어 당신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과 연인도 함께 탈 수가 없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겪는 감정의 진폭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오롯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러니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세요, 이 여정은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율성, 도전정신, 희열로 가득찬 나날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월급날'은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잠 못 이루는 날이 잦아졌을테고 부족한 잠만큼 비례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있을 겁니다. 그러다보면 의도치 않게 동료에게 날이 선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아쉬운 의사결정으로 동료를 실망시킬 때도 있을 겁니다. 함께 도원결의했던 최초의 동지들이 있다고 하셨던가요?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들 중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한 번 세어볼까요? 많은 창업자들이 가장 무서운 순간 중 하나로 ‘직원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카톡메시지 보낼 때’ 를 꼽습니다. 그 짧은 메시지 하나에 오만 생각이 다 든다나요. 혹은 반대로 함께하던 동료를 강제로 배에서 내리도록 해야했을 때도 있었겠습니다.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이죠.
일만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월급받던 때보다 오히려 더 복잡한 인간관계의 문제를 풀어내야 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5% 정도 하기 위해서 95% 의 하기 싫은 일들을 해내야 합니다. 영수증 정리하기, 각종 엎질러진 일 수습하기, 떼인 미지급금 받으러 다니기, 힘들다는 직원 토닥거리기, 투자자 찾으러 다니기 등..셀 수 없죠. 직원은 그만둘 수 있어도 당신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안개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휘청이더라도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사장의 일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현실을 깨달을 때 즈음 당신이 그렇게 욕하던 그 많은 사장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을 좋아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들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을거에요. 그렇게나 미워하던 사장님을 그리워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항상 비판적이던 동료가 박차고 나가 창업하고는 몇 년 뒤 ‘이제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며 찾아왔던 이야기는 대표님들의 고정 레퍼토리 중 하나거든요.
시작을 대단하게 여기지 마세요. 창업의 여정에서 시작은 절대 반이 아닙니다. 반이기는 커녕 ‘앞으로 펼쳐질 지난한 여정을 모르는 가장 어리석은 상태’ 일 것입니다. 새로운 기대로 부풀어 있는 여러분의 뜨거운 심장을 차갑게 식혀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우며 일단 시작하면 쉽게 끝내기도 어렵습니다. 가끔은 사회가 창업을 권장하는 만큼,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문을 닫게될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업을 실패했더라도 여러분의 삶은 계속 나아가야 하고 시작하는 것보다 잘 매듭짓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서요.
그런데요, 참 신기하게도 창업자들에게 창업을 해본 적이 없는 삶과 창업의 경험을 살아본 삶,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그들은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이미 그 고통을 알고 있고 여전히 하루하루가 고난행군임에도 불구하고요. 각종 난관과 불확실성,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로 가득한 여정이지만 창업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스릴, 값진 경험과 매력 또한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거든요.
여기까지 읽고 나서도 회사를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 변치 않으셨다면.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축하합니다.
힘든 순간들이 올 때마다, 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의심하게 될 때마다 꼭 기억하세요. 현대그룹 창업자도 그 최초의 시작은 작디작은 쌀가게였습니다. 이제 막 5년 차에 접어든, 우리가 전시를 보고 있는 이 공간 Piknic도 앞으로의 어떻게 달라져있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창업자 당신의 꿈과 실행에 달렸습니다. 한계를 짓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의 회사는 더 크고 대단해질 수 있습니다.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있되 시선은 저 너머를 보는 연습을 하세요. 현실은 냉정하게 꿈은 담대하게.
마지막으로 모든 창업자분들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