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ationalDoctrine To WomanCentric AI
'누구나 쓸 수 있게 되는 순간'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난다. 처음엔 7평 남짓 연구실을 맴돌았던 기술들이 어느 순간 대중의 손에 쥐어졌을 때 부지불식간 사람들의 일상이 되고, 전에 없던 기회가 열린다. 인터넷이 그랬고, 모바일이 그랬다.
2010년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모바일시대의 경쟁은 철저히 로컬이었다. 실시간성, 위치기반이라는 모바일의 속성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촘촘히 엮기에 최적이었고 시장의 기회를 가장 날렵하게 파고든 건 해당 지역을 가장 잘 아는 로컬 플레이어였다.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 야놀자, 당근마켓 같은 로컬의 강자들이 승기를 잡았고 '유니콘'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15년이 지나 AI 가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초입인 지금, 상황은 많이 다르다. 언어라는 장벽은 이제 거의 무의미해졌고, 대부분의 데이터는 온라인에 존재하며, 서비스/제품을 만드는 것 자체도 오픈되고 대중화된 기술 위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전세계 난다긴다하는 팀들이 비슷한 도구로, 비슷한 문제를, 비슷한 속도로 풀어내는 환경. ‘쟤네가 저 시장 집중할 동안 우리는 이 시장에서 먼저 풀면 된다’는 로컬의 시간차가 이제 없고, 내가 먼저 풀고 있어도 금새 쟤네가 와서 더 잘 풀어버릴 수 있다. 넘볼 수 있는 시장의 크기는 훨씬 더 커졌지만, 경쟁의 난이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더더 높아진.
“한국에서 탄생한 이 회사가 왜/어째서 글로벌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나는 믿는가” 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한국인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어디인지 파악하고 글로벌플레이어들보다 더 나은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예를 들면 다음의 두 질문에 대해 최소 하나는 Yes 라고 대답이 나오는 분야/회사를 찾자고.
Data Defensibility: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방대한/독점적인 데이터셋을 보유하고 있는가
테스트베드 + 고객기반 우위: 주요 고객이 한국/아시아에 있어, 빠르게 피드백 받고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이 있는가
그런 회사들을 언제나 찾고 있어요. 아직 회사가 아니라도, 5명 이하의 빠르고 똑똑한 팀과의 투자와 상관없는 대화핑퐁 커피챗도 환영합니다
이런 생각들의 꼬리를 물고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지금 시점의 Ver 1.0 생각이고, 더 좋은 인풋/반박과 가르침으로 수정/발전하기를 바라기에 사석에서든 댓글이든 편하게 의견 주시면 좋겠다)
1. One vertical, One nation
요즘 소버린 AI에 대한 논의가 많다. 데이터 주권, 인프라 독립—이 흐름 자체는 분명 필요하고, 국가 차원에서 이런 담론이 시작된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긴 하다. 그러나 정부도, 기업도, 언론도 모두 ‘우리도 자체 LLM을 가져야 한다’는 방향에 관심을 쏟고 있고, 실제로 그 방향이 정답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예민한 주제이지만.. 정말, 굳이 한국이 범용 LLM을 독자적으로 만들어야 할까? 지금처럼 자본과 인재가 한정된 상황에서 전 세계 빅테크와 똑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일까? 소버린 AI 좋은데, 그런데 그게 꼭 소버린 LLM일 필요는 없지 않나? 차라리 한국이 진짜 잘할 수 있는 한 버티컬에 집중해서, 거기서만큼은 글로벌에서도 제일 정교하고 잘 작동하는 Vertical LLM을 만들어보는 게 훨씬 실질적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핵심 전장을 식별하고, 그 전장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한국이 진짜 강점을 가진 산업을 고르고, 국가 차원의 이니셔티브를 모으고, 데이터를 가진 기업들이 먼저 움직이며, 그 안에서 스타트업과 연구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 "이 버티컬에서는 한국이 제일 잘한다”는 서사를 진짜로 만들어보는 것. 한국이 실제 산업현장에서 문제를 풀어본 경험도 있고, 데이터도 가지고 있고, 기술자도 있고, 고객도 있는 영역. 예를 들어 제조, 병원 기반 의료 같은 곳.
사실 이 영역은 나 같은 VC가 스타트업 한 두 곳에 투자한다고 풀 수 있는 과제가 절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데이터를 가진 큰 기업들이 먼저 움직여줘야 하는 일. 그렇지만 이런 방향성이 제시되고 우리가 조력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면 이건 단순히 성과를 넘어서, 진짜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 여성특화AI
조금은 다르게 생긴 생각이 또 하나 있다. AI 시대에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버티컬은 뭘까 계속 생각하다가
‘여성’에 특화된 AI서비스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AI는 그 누구보다 개인의 맥락을 이해해야 진짜 ‘내 것’처럼 느껴지는데, 지금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AI 기반 서비스들은 제품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팀 대부분이 남성이다 보니, 그 안에 녹아 있는 UX나 언어, 피드백 구조 역시 자연스럽게 논리적이고 효율 중심적인, 직선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기를.. 이건 AI의 성별 편향이나 차별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구조적으로, ‘남성 중심의 문제 인식’에 기반한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시선에서는 떠올리기 힘든 서비스들..하지만 여성들이 진짜 필요로 하고, 쓰는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서비스야’라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누군가가 설계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진입장벽이자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특화AI' 라는 게 뭔데? 라고 물으신다면 아직 모호하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강한, ‘여성성에 특화된 산업’들을 떠올렸다. 뷰티, 패션, 안티에이징, 성형, 산후조리, 감정노동, 루틴관리…한국 안에서는 이미 밀도 높은 수요와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쌓인 디테일과 트렌드, 시스템의 복잡도는 다른 나라와는 격차가 여전히 큰 영역들이라고 느껴졌다.
그냥 막 던져보면.. 피부 상태에 따른 화장품 추천, 패션 컨설팅과 옷장 정리, 시술 이력과 다음 시기 추천, 감정 상태에 맞는 루틴 제안, 타로나 사주처럼 감성적 소통이 포함된 위로성 콘텐츠, 임신·출산·갱년기 등 여성을 둘러싼 생애 주기에 맞춘 맞춤형 서비스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서비스들을 '기능적'으로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나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해주는 AI”의 형태로, 기능 그 자체보다도 ‘감정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AI’로 다가와야 한다.
단순한 툴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를 맺는 플랫폼. 그리고 이후 커뮤니티 기능이 붙을 수도.. 사용자 경험이 쌓이며, 데이터가 쌓이고, 네트워크가 생기고, 결국엔 록인이 만들어지는 구조.
내 표현 부족으로 좀 이상하게 들렸을 수 있어도 AI 대항해시대의 아직 무주공산인 큰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당분간 계속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제품을 만들고 있는 팀,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첫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팀이라도 좋다. 이런 제품을 만들고 있는, 만들 수 있는 팀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계속 만나고 싶다. 낯설고 어설프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