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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Dec 27. 2020

죽은 친구의 꿈을 꿨다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 밤을 걷다> 리뷰

꿈을 꿨다. 죽은 친구가 나오는 꿈이었다.


친구는 '본인은 죽은 게 아니고, 잠수를 탄 거'라는 뚱딴지같은 얘기를 늘어놨다.

당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나에겐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병원에서 친구 폐의 CT촬영본을 보고 있었고, 그곳엔 폐만 한 암덩어리가 있었다.

유리창 너머 바깥에는 내가 기억하는 해사한 얼굴의 친구가 보였다.


또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한 거리의 창문을 통해 손하트를 그리며 장난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을 꾼 그날 밤,

배우 이지은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가 생각났다.

플롯은 단순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은과 한 때 애인이었던 남자 K가 꿈속에서 아득하게 잊힐 대화들을 나눈다. 지은은 K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본인의 죽음에 대해 묻고, 대답한다. 살아있을 때 K와 함께 마음을 나눴던 서순라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친구 꿈을 꾼 날 밤, '밤을 걷다'를 떠올린 이유는 단순하다. 흑백 화면, 서정적인 대사 그리고 꿈결 같은 연출을 보면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친구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1. 언젠가 한 번 '꿈에는 색깔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김종관 감독이 의도적으로 흑백으로 연출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삶과 죽음, 흑과 백. 날카로울 만큼 단순한 이 색깔은 한없이 아득하고 미끄러져가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잘 보여준다.


2. 지난 생을 회상하듯 공허한 눈빛으로 무심하게 내뱉는 지은의 대사들이 좋다. 친구가 내뱉고 싶지만 결국은 삼켰을까 싶은 말들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있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나를 아는 사람 중에는 네가 있었고 너 외의 다른 사람들이 있어
나는 너 외의 사람들한테 외로움을 느꼈어
너를 제외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들에 외로움을 느꼈어
네가 항상 옆에 있어줬는데 부질없이 괴로워했네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데 없이 잊힐 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뿐이네
안녕


3.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엔 이렇다 할 시작점이 없다. 잠이 들고 그렇게 느닷없이 이야기가 시작된다. '밤을 걷다'에서도 마찬가지다.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면서 두 사람이 걷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와 비슷하게 지은과 K가 서순라길에서 와인을 마시는 장면에서는 갑자기 '사랑의 기쁨'이 울려 퍼진다. 자다가 실제로 어떤 노래를 들으면 꿈에서도 그 노래가 들리듯이. '밤을 걷다'는 진공상태 같은 꿈속을 아주 그럴싸하게 펼쳐 놓았다. 과연 영화적인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다짐한 날들이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를 보면서 저렇게 내실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베티 블루 37.2'에서 희생의 형태를 띠고 있는 사랑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소망을 품을 만큼 깊게 몰입 했지만, 내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기에 오히려 작품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도무지 거리를 둘 수 없었다. 이지은 씨의 얼굴에서 자꾸만 죽은 친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지은 씨가 대사를 뱉을 때마다 다행히 아직은 생생한 친구의 목소리들이 중첩되어 들렸다. 한없이 슬펐고, 비릿한 감정들이 내 안에 고였다.


이 영화를 자살 생존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자살 생존자'라는 단어는 얼마 전 경향신문의 한 기사에서 처음 접했는데,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살자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자살 유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 애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입을 뗄 수도, 발을 뗄 수도 없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장 원초적인 감각을 쓰는 일이었는데, 그게 나한텐 뭔가를 보는 일이었다. 책이든 영상이든 사진이든 거리의 풍경이든. 상황을 회피하거나 잊으려는 노력은 아니었고, '난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다'라는 생존 감각을 더듬는 행위에 가까웠다.


멈춰 있는 공기에서 나 혼자 있는 것 같을 때, 페르소나의 '밤을 걷다'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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