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홀로 함안여행

한옥 가득한 동네

by 박약

마침 일정이 하나도 없는 주말이였다. 일에 치여살때는 큰 프로젝트가 끝나면 무조껀 혼자 여행을 떠나서 푹 쉬다오고는 했는데, 요즘은 내내 쉬고 있어서 크게 여행도 땡기지가 않았다. 아, 주말이 더 심심한데. 분명 친구들은 각자의 가정, 각자의 종교와 일정 내에서 바쁠거고 빨간날은 어딜 가도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 혼자 일박이일 여행이나 가자. 며칠 전부터 생각했다.


사실 밀양을 가보고 싶었는데, 두시간 거리는 부담스러웠다. 동서남북 한 시간 거리중에 여행으로 안가본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바로 함안. 낙화축제 유명한 그곳? 그래, 거기로 가자. 하고 검색해보니 한옥이 가득한 동네였다. 경상도는 말투가 달라서 여행온 느낌이 확 오곤한다. 음, 재미있겠군.


토요일날 새 옷을 입고 가고 싶어 새벽부터 꼬까옷을 만들다가, 완성후 졸려서 낮잠을 자니 점심께였다. 폭풍 검색을 하고, 네이버지도를 찾아 관광지의 위치를 대충 표시했다. 가방에 책과 아이패드, 잠옷과 속옷과 다른 여벌옷... 필요한걸 잔뜩 넣고 텀블러까지 야무지게 챙겨 출발했다. 막상 가는데는 한시간 이십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오랜만의 고속도로 운전이였다.


함안에 도착하니 시간이 벌써 세네시였다. 먼저 악양에 갔다. 하동에도 악양이 있는데, 함안에도 악양이 있구나. 악양생태공원에는 가족들 몇 팀, 커플 몇 팀이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혼자 저벅저벅 걸어갔다. 탁 트인 남강이 시원하게 반짝거렸다. 낮은 산들이 뒤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달달한 노래들을 들으며 따뜻한 햇볕과 함께 걷다보니 악양루가 보였다.


악양루에 앉아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꽃이 필 계절에 왔으면 훨씬 더 아름다웠겠지만, 대신 그만큼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겠지. 난 사람없는 관광지의 황량함이 좋다. 보통 그래도 충분히 아름답다. 남강의 여울을 바라보며 사색도 하고, 쓸데없는 잡생각도 하고, 폰도 실컷 보다가 내려왔다. 맑은 공기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이게 참 좋단 말이야.


한시간정도의 시간이 흘러 차에 들어오니 묘하게 달달한게 땡겼다. 가방에서 스타벅스 쿠키와 무당젤리를 꺼내 신나게 먹었다. 당이 덜 찬것 같아 비스킷도 몇개. 요즘 물을 자주 마셔야 해서 텀블러의 물도 흡입. 이제는 무진정으로 출발했다. 낙화축제를 할때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사람이 몰린다던데.


무진정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공간이 작았다. 지금은 나뭇잎 하나 얹어져있지 않은 가지들이지만 날 좋을땐 꽤 아름답겠다 싶었다. 연못에는 잉어가 있고, 돌다리와 가운데 정자도 있었다. 뒤에는 한옥이 있다. 난 정말 부자가 되면 꼭 이런 한옥을 만들고 싶다. 시야가 트인 곳에 연못을 조성하고 근처 꽃과 풀을 예쁘게 가꾸고, 가운데 정자에서 작업도 하고, 파티도 하고, 노닐고 싶다. 뒤에ㅓ 있는 풍경 아주 좋고 칸이 아주많은 대형 한옥에서 사는거야. 아무래도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체질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무진정을 거닐었다. 몇 커플들의 이야깃소리가 들린다. 경상도 사투리는 사람을 집중하게 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애교있어 참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근처의 함안말이산고분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꽤 올라가니 드디어 언덕에 도달했다. 서자마자 노을이 확 퍼진다.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내가 한바퀴 돌고 내려갈때까지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으면 좋으련만.


큰 고분이 듬성듬성 있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낮은 산등성이들 사이에서 올라오는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조용해서 바람소리가 다 들렸고, 반대쪽에는 낮은 집들도 있었다. 아 딱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었는데. 너무 조용해서 바람소리가 다 들리는 곳. 노을이 저무면 칼같이 어두워지는 곳. 아마 별도 시원하게 내리겠지. 허무하리만큼 조용하고, 그래서 너무 안락한 마을.


오늘 방문한 곳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 그 자체에 노을은 깊히 아름다웠으니까.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풍경을 만나면 마음속 감사함이 절절히 퍼진다. 혼자 찬찬히 걸으며 감사에 대해 생각했다. 올해 연말정산을 조회해보니 조금씩 한 기부금이 쌓이니 나름 큰 액수가 되었다. 내가 뭐 아주 크게 기부할만큼의 능력은 아직되지 않지만, 그래도 의지만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게 참 감사했다.


작년에는 운좋게 가슴따뜻한 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해였다. 기부나 봉사나 나눔이 참 우리 세대에는 어렵다. 그럼에도 올해 만난 사람들중에 깊은 얘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한 선한 방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나눔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과 알게 되고 대화하게 됨에 감사함이 들었다. '뭐 나나 잘살지' 생각하는 사람도 꽉 찬 세상, 또 밝은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올해는 특별히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그래서 선을 더 욕심내고 더 적극적인 나눔을 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나는 아주 능력있고 싶다. 돈도 잘 벌고 실제 능력들도 훨씬 많았으면 한다. 그리고 세상에 더 많이 나누고 싶다. 지금 나눌 수 있는 것이 너무 작아서, 자꾸 욕심이 난다.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삶이 천천히 내가 원하는 온도를 맞춰주리라 믿는다.


내려와 김밥을 두 줄 샀다. 여기까지 와서 맛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었는데, 며칠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용납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하나로마트에서 장도 봤다. 제로맥주와 안주로 김부각, 스테비아 토마토도 샀다. 식빵에 잼을 발라온게 있어서 우유도 하나 샀다. 이것저것 몇 개를 사서 숙소로 이동했다.


많이 걸었더니 살짝 배가 고픈거 같아서 쌀국수 컵라면에 김밥을 몇 알 먹었더니 금방 배가 찼다. 배가 차서 제로맥주를 먹지 못해서 아쉬울 지경이였다. 피곤했나, 배가 부르니 금방 졸려서 책 좀 읽다가 잤다. 다음날 아침 얼굴이 탱탱 부어서 깜짝 놀라 어제 컵라면을 다시 보니, 하루 권장량 나트륨을 넘는 양이 들어가 있었다. 아우.. 좀만 먹을껄.


스파가 있길래 일어나서 미지근한 물에 스파를 좀 했다. 마침 요즘 따신물에 담그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스파를 해도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제로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김부각을 텄다. 처음보는 제조사인데 너무 건강한 맛이였다. 아, 좀 짭잘해야 맛있는데 하면서 김부각은 다 먹고 제로콜라는 반만 먹었다. 먹다보니 어제 남은 김밥이 보였다. 그래, 요것도 몇 알 먹자.


먹고 침대로 이동해 편한 자세로 '하버드 사랑학'이라는 책을 한참 읽었다. 여자든 남자든 잘보이려고 통념에 맞춰 애쓸 필요 없단 얘기였다. 그래, 자연스러운게 최고야. 평생 척할수도 없는거고, 과함도 부담스럽고.. 읽다 지루해져 일어나 '개방성에 대하여'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나니 곧 퇴실시간이라 샤워하고 챙겨 나왔다.


오늘은 오후 4시에 브랜딩 스터디가 있어 그때까진 맞춰 가야했다. 마애사에 도착하니 관광버스가 6대는 족히 보였다. 아 고즈넉한 절에 가려고 온거였는데 오늘 뭔 행사가 있나. 떡국도 나눠주고 절밥도 먹는 모양이였다. 절밥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나도 한 입 먹어보고 싶었으나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이건 관광버스를 타고 와야지만 주는 모양이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절을 한 바퀴 돌다가, 마애불 이정표를 보았다.


마애불? 어디서 들어본것 같기도 하고. 이정표까지 있는거 보니 유명한 모양이지, 하고 산을 올랐다. 꽤 오르니 두번째 표지판이 나타났다. 마애불까지는 0.65km 거리. 스커트에 블라우스에 코트를 입고 왔지만 신발은 나름 고워크였고, 길이 다 계단으로 잘되있었다. 그럼 또 찬찬히 올라갈만 하지. 수많은 사람이 복잡거리는 절과 달리 거의 오르는 사람이 없어 고즈넉하니 좋았다.


0.65km는 생각보다는 높았다. 가다 힘들면 쉬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어느덧 보이는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 아 이건 분명히 국사시간에 본 것 같다! 반가운 마음에 마음속으로 소원을 실컷 빌었다. 근처 또 다른 불상이 있다길래 150m를 가서 금불상도 보고 왔다. 우연히 마애사에 한시간 넘게 머물렀지만, 내려오는 길은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좋았다.


마애사를 뒤로 하고, 마지막 코스인 어계고택에 도착했다. 평소 낮잠잘 시간이라 그런지 살짝 잠이와서 누워있는데, 차안이라서 그런지 잠을 자지 못했다. 누워서 좀 쉬다가 남은 참치김밥 한줄을 다 먹었다. 역시 움직여야 사람은 소화가 되는 모양이였다. 너무 많이 먹었나? 싶었는데 나름 괜찮았다. 쉬다 나갔는데 꽤 날이 추워져서 어계고택은 금방 보고 돌아왔다. 이젠 다시 애정하는 소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가끔은 여행가기전 막상 떠나기가 귀찮기도 하고, 아 가지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난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왠만하면 가는 편이다. 내가 움직이고 다른 환경에 가봐야 다른 생각도 들고, 이게 또 어떤 기회를 내게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낭비 돈 낭비를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설렘 속에 사는 것도 꽤 괜찮다.


혼자 떠나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글을 쓰게 되기도 한다. 새로운 시야에서는 늘 새로운 것이 보인다. 음식 종류나, 먹는 시간이나, 자는 곳이나, 갈 곳이나.. 단 하나도 타인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나 하고싶은대로 하면 된다. 그래서 가끔은 궁상맞게 다니기도 한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그래서 혼자 떠나는 여행은 진짜 특유의 매력이 있다.


앞으로도 난 내가 혼자 많이 떠나면 좋겠다. 온전한 자유와 재미를 느껴보기를.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익숙한 환경에 대한 감사함도 같이 떠올리기를. 다음 솔로 트립은 어느 낯선 곳이 될까. 그때 난 너무 지쳐떨어져서 쉬러 갈까, 아니면 새로움을 맛보러 떠나온걸까? 궁금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랜 취미, 가죽공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