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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20. 2021

여자란 무엇일까?

내 마음속의 천하대장군

내가 여자라는 것에 별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 여중 여고를 나와서 그랬을까, 쿨한 부모님 아래 책으로 배운 세상에는 남자든 여자든 별 차이가 없었다. 살다 보니 내가 여자라는 것은 남자라는 것과 완전히 다른 거였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여자라는 것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이 에너지는 당연히 아깝다. 뭐든 새 나가는 에너지는 아까운 법인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로 새 나간다는 게 열 받을 만큼.


내 외모는 여성스럽지만 내 가슴속에는 천하 대장부가 산다. 티에 바지가 더 편하고 막 잘 꾸미고 예쁘게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꺼냈을 때, 상대가 '헉-' 할 정도의 차이는 있나 보다. 그 반응은 가끔 재밌기도 하다. 이 기질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충실히 나의 삶을 살고 있는데,  사회가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먼저 짚고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 은근하고 묘하고 어쩔 땐 대놓고도 브레이크가 걸린다.


도대체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성은 무엇일까? 유전자적으로는 여성이 조금 더 건강하며 오래 산다는 소리도 있다. 모든 건 장단이 있을 것이고, 나는 자꾸만 장점을 생각해보려 하지만 천하 대장부랑 여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잘 안 맞는 것 같다. 천하 대장부 성격도 여자라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이 두 개의 상성이 자주 쟁쟁거리니까 짜증 난다. 그러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에나 쟁쟁거릴 것이지 매일 열심히 살고 있는 내 일상을 불쑥불쑥 방해한다.


학생 때에도 연애는 곧잘 했는데, 그럴 때나 여자라는 것이 상기되곤 했다. 본업이 학생이니까 해봐야 잠깐잠깐 만나는 정도라서 그냥 잠깐 재밌게 놀고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과 육아를 생각하고 있으며, 꼭 결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이가 갈수록 내가 여자라는 것은 내 정체성을 흔들곤 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여성과 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안온한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도대체 남들은 내가 여자라는 기본적인 이유로 내게 뭘 기대하는 건지, 아직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본가에 가면 자주 할머니 집을 간다. 우리 아빠는 내게 높은 사다리 타는 법부터 드릴 쏘는 법까지 다 알려주었다. 남동생은 항상 나보다 3살이나 더 어리기 때문에, 무조건 내가 일찍 배웠다. 삽질하는 법도, 무거운 감자를 덜 무겁게 들어 옮기는 법도, 서양식으로 칼과 나이프를 쓰는 법도, 리본을 묶는 법도. 나이차가 있는 친척 오빠 한 명뿐, 양가에서 내가 첫째였고 그래서 웬만한 말들과 행동들은 사회적 기준에 상관없이 용인되었다. 어릴 때는 움직임이 기적 그 자체였고, 좀 커서는 장녀이니까.


가끔 아빠가 '너 같은 여자애가 어디가 있냐'라곤 했어도, 일반적인 여자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고 아마 아빠도 내 또래 일반적인 여자애들을 잘 몰랐을 거라 생각된다. '야무지다', '기세다'라는 말들을 가끔 들었지만 그건 허공에서 흩어지는 단어들이었다. 끝에서는 '그래도 징징 우는 것보단 낫지'라는 말이 붙어 칭찬인 줄 알았다. 난 기 세다는 게 정확히 뭔지 몰랐고 근가 보다 했다. 성인이 되고 나니 기가 센게 아니었다, 야망이 큰 것이었고 도전적이었던 것이다. 기가 센 스타일은 따로 있었다.


겪어봐야지만 아는 세상이 있다. 어릴 땐 여자든 남자든 별 상관없는 세상인지 알고 컸다. 누구든 노력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받고,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세상. 실제 세상은 교과서처럼 흐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개인 노력으로 높은 성취를 이룩할 수 있고 뭐든 분쟁보단 조화가 낫긴 하다. 그런데 이런 잡음들은 생각도 못했다. 물론 출산에 따른 경력단절 같은 큰 흐름은 알았으나 육아에 대한 남녀의 준비 태도 차이, 능동적인 여자들이 듣는 대우, 잠재적 연애 대상자 취급 등..


같은 나이이고 결혼을 준비하는데 나는 출산 후 미래를 반영해서 현재를 계획하고 싶고, 남자 친구는 쉽게 말한다. '아직 하지도 않은 결혼을, 아직 있지도 않은 아이를 뭐 그렇게 신경 써.' 어쩌면 워낙 계획적인 내 성격과 흐르면 흐르는 대로 사는 그의 입장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성격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조차도 성별의 차이가 없었을까? 남자는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하는 게 본분이라는 그가 어쩔 땐 아주 든든하다가도, 이럴 땐 맥이 탁 풀린다.


사실 결혼과 육아도 겪어봐야지만 아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무리 계획하고 알려해도, 실제는 생각과 다르다고 모두 입을 모아 얘기하니까.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나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 삶에 집중해서만 살고 싶지만, 절대로 신경이 꺼지지가 않는다. 햄스터도 토끼도 개도 한 마리 키워본 적 없는 내가 애를 어떻게 키울까 싶은데 같은 상황인 남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하면 하는 거지, 처음엔 다 모르는 거지 하면서. 나 혼자만 고군분투할 필요가 없지 싶어, 그냥 나도 최대한 신경을 그냥 끄기로 했다.


내 가슴속의 천하 대장부는 내가 하겠다고 생각한 일들을 끝끝내 하게 한다. 포기를 몰라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꼭 썰어야 한다. 용의 꼬리보다는 닭의 대가리여야 하고 어디서든 기죽지 않게 한다. 무서움이랑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아무리 불편한 자리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맞서게 한다. 누가 살짝 내 털끝을 당기면 바로 달려가서 남들이 보든 말든 앙하고 물어버려야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그의 본분이라니까, 그래? 그럼 나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고 그는 보조하며 살기로 협의했다. 각자 원하는 거 하면서 사는 게 아무래도 좋지.


나이가 조금 들면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좀 시들해질까? 오히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스펙트럼을 넓게 이해한다. 별로 그 길을 걸어본 적 없던 사람으로서 도대체 '젊은 여자'로 함축되는 객관적 이미지는 어떻게 정의되는지 정말 궁금하다. 가능하다면 전지에 넓게 써보고 나랑 맞는 이미지들에 잔뜩 동그라미를 쳐서 나는 사회가 정의하는 젊은 여성에 이미지에 몇 퍼센트가 부합하는지 계산해보고 싶다. 내 주변엔 수동적인 사람이 그다지 없는데, 도대체 뭐길래 나는 맨날 아니래.


여자와 관련해 가장 마지막에 들었던 말은, 직원들 앞에서 들은 "너 그래서 어떻게 시집갈래?, 너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냐?"라는 화난 대표님의 말이었고, 내 입에서는 "나 좋다는 사람 쌔고 쌔서 줄까지 섰으니까 걱정 하덜덜 마세요. 아, 관심도 끄시고요"라는 말이 나왔다. 나 말고 천하대장군이 답한 대답이었다. 도대체 일로 화난 얘기가 왜 결혼생활까지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너 그래서 어떻게 장가갈래? 너 같은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냐?"라는 말은 글로만 봐도 어색하지 않나? 첫째 마디야 그렇다 치고, 둘째 마디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다.


사회의 기준점에 별로 부합하지 않은 여성인 내가 생각하건대, 여성과 남성에게 기대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주야장천 듣는 내가 그럼 남자의 기준점인가? 나 같은 스타일의 남자들 별로 없던데. 그들도 모두 기준점에 맞지 않아 일상에서 잡음이 생기고 있는 걸까? 잠깐,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란 말을 내 남자 친구가 듣는다면 매우 수치스러워할 것 같은데, 나는 그만큼의 수치수러운 말을 자주 듣고 있는 거잖아?


자, 이제 아주 간단해진다. 곧 죽어도 지기 싫다고 천하 대장부가 소리치고 있다. 내가 어떤 성별이 들어간 말을 들었을 때, 이 상황을 남자 친구가 들었다고 가정해보고 예상되는 대응을 하면 된다. 물론 치환하는데 에너지가 더 들어가지만, 그 정도 세상의 불공평함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러면 기준이 아주 명확해진다. 물론 남자들이 들었을 때 기분 나쁜 말들도 있겠지, 그런 건 남자들이 여성을 넣어서 대응하던지 어쩌든지 알아서 풀어야 할 문제고, 나는 내 문제 먼저 해결하련다.


아 도대체 여자가 뭐길래, 성별이 뭐길래 새벽 운동을 안 간 이 꿀맛 같은 휴식의 시간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보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냐면, 동성은 멋있다고 좋아하고 이성은 매력 있다고 좋아합니다. 전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아주 인기가 좋은 편이에요. 원래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을 늘 궁금해합니다. 내가 가는 길에는 늘 잔뿌리같이 날 발 묶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런 거 다 뿌리째 뽑아보면서 그저 앞으로 가보라고 천하대장군이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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