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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15. 2021

심심함 즐기기

나의 심심함 관찰기

남자 친구에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사랑해'도 아니고 '배고파'도 아닌, '심심해'다. 어떻게 이렇게 심심함을 자주 느끼는지, 스스로도 참 귀찮게 산다 싶다. enfp들은 심심함을 다른 유형보다 500배는 더 많이 느낀다는데, 그래서 그럴까? 제일 큰 문제는 포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심심함이 찾아오면 즉시 바로 해결해야만 한다. 어떤 것을 해서라도! 해결이 안 되더라도 노력해야 한다. 


심심함을 아주 잘 느끼는 사람으로서, 심심함을 관찰한 결과를 말해보려 한다. 일단 심심함은 완전히 심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물리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거나, 바쁘더라도 심심할 수 있다. 보통 내가 심심하다고 하면 우리 가족은 무심하게 '네가 한가하구나'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어제 코딩 수업을 들으면서도 아주 심심했다. 보통 '심심할 틈이 없다'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오히려 심심해지면 수행 지속이 힘들다.


코딩 수업 어디 언저리에서 심심함이 뿅 하고 나타난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면 하고 있던 일에 집중이 안된다. 뭔가 더 재밌고 흥미로운 일을 찾고 싶은 욕구가 득실득실 일어난다. 나는 일을 할 때 집중이 안되면 그냥 안 하는 스타일이라 당장 내팽개치고 재밌는 일을 찾는다. 예전에는 이게 일로 발생돼서 회사에서 a라는 일을 하다가 심심해지면 바로 새로운 b라는 일을 찾아 따오곤 했다.


심심함은 내게 잘 찾아왔고, 이렇게 일이 많아지고야 마는 상황이 반복되고 나서는 이제 일로 심심함을 풀지 않기로 했다. 나를 진정시키려는 팀원들의 눈치도 보였고 스스로도 너무 바쁘고 벅찼기 때문이다. 심심함에 대한 원칙은 간단하다. 심심함은 스스로 풀어야만 한다. 자꾸 심심하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일을 주고 자기 일을 해주라고 하는데, 내 일도 재미없어진 마당에 남의 일이 재밌을 리가 없다.


심심함은 아주 잠깐 왔다가는 심리적 기분이다. 어제 오후 갑자기 심심함이 또 찾아와서 남자 친구에게 찡찡대 봤다가 바이올린을 켜봤다가 책을 읽어봤다가 새로운 음식을 시켜먹어 봤다가 빔프로젝트로 함께 영화를 봤지만 그래도 해결되지 않았고 계속 심심했다.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는 날도 있다. 어쩌다 밤까지 시간이 흘러 자고 일어나니 에너지가 충전되어 심심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에게는 '심심함'이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남들은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자주 오지도 않는 감정인 것 같다. 살짝 스며들듯 심심했다가 금방 해결되나 보다. 나는 걱정이나 불안이 잘 없는 사람이라 자기 전까지 뭔가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한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매일 걱정을 품으며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것도 약간 기질적으로 타고난 감정이 아닌가 싶다.


내가 잘 심심하다고 하니까, 남들은 내가 여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개념이 완전히 아니다. 여유롭다고 불안과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내게 심심함은 강하게 온다. 갑자기 휘몰아쳐서 나는 방어도 못하고 꼼짝달싹 갇혀버린다. 심심함은 어느 날은 바이올린을 치게 하고 어느 날은 글을 쓰게 하고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게 한다. 무언가 내가 생각해서 표현하는 것은 가장 빠르게 심심함을 제어하는 방법이다.


어쩔 땐 심심함이 강한 영감으로 온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 들들 대는 것이다. 시작하면 완전히 몰입해서 뭔가를 하고 나서 심심함이 사라지면 난 진이 다 빠지는 것이다. 어쩔 땐 새로운 게 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서치를 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좋은 기회가 온다. 덕분에 난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된다. 이렇게 만난 좋은 기회들도 많다.


어릴 땐 가끔 오던 이 심심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고 자주 온다. 해소되는 날도 있지만 해소가 안 되는 날도 있다. 어제 같은 날은 그냥 심심함을 다독이다가 보낸 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뭘 하는지, 심심하면 뭘 어떻게 하는지 항상 궁금하다. 그런데 나처럼 심심함이 강하게 오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다. 내 남자 친구는 심심함을 되게 쉽게 보낸다. 


그런데 나는 물리적인 무료함은 또 사랑한다. 북유럽 같은 조그만 소도시에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살려고 이사를 왔고, 지금은 일도 쉬고 있다. 물리적인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일을 쉬지 못한다. 물론 미술, 바이올린, 미싱 등의 레슨을 받고 중국어, 운동, 글쓰기 등의 수업도 가고 간간히 수업도 하고 비영리단체의 활동도 해서 매일 또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할 때는 쉴 수 있는 일정들이다.


그런데 심적인 심심함은 나를 너무 지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차이를 잘 모르고 내가 여유로워서 심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바쁠 때도 속이 자주 심심하다. enfp들은 많이들 이렇게 심심할까? 여러 명이 모여 같은 상황일 때도 나만 심심할 때가 많았다. 주변 사람들은 나의 심심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나름 중요한 감정이다. 나는 이제 성숙한 어른이니까 심심함을 잘 활용하고 성숙하게 보내려고 한다.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하는 이 감정의 정확한 명칭이 심심함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안고 가야 할 나의 기질이라면, 아직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금 더 천천히 관찰하고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겠다. 스스로를 정확히 알기에는 물리적 삶을 너무 조금 살았다. 시간을 들여 이 감정과 더욱 친밀해지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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