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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lalaika Mar 10. 2020

여행의 조건

300만원 그리고 일주일

여행의 조건이란 게 있다면 그건 시간과 돈이다. 그래서 돈과 시간이 많은 은퇴한 노년 부부에게는 크루즈 여행이 적당하고 돈은 없지만 시간이 많은 대학생에게는 배낭여행이 주어진다. 2020년에 나는 우연히 테슬라 주식으로 300만 원을 벌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휴가가 있었다.

일론 머스크가 생방송 중에 대마초를 피워 테슬라 주식이 급락하던 시절이 있었다. 난 그때 몇 주를 샀고 초심자의 행운으로 여행 경비를 벌었다.


나는 그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에세이 <대체 뭐 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를 보면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행을 떠나는 공항 리무진 버스 안에서의 들뜬 기분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으로 적응하긴 힘들다. 동결 건조식품처럼 퍼석하게 메마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돈과 시간이 주어졌을 때 처음 떠올린 건 여행이었다.


여행의 행선지는 부탄이었다. 아시아를 벗어나긴 싫었고 서울의 겨울 미세 먼지는 피하고 싶었다. 부탄을 이야기할 때 따라붙곤 하는 수식어인 지구에 마지막 남은 '샹그릴라'라든지 '행복지수' 같은 키워드들은 처음부터 떠올리지 않았다. 300만 원이라는 돈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작고 사소한 취향이 더해져 그렇게 행선지가 정해졌다.

파로의 랜드마크이자 부탄 관광 엽서의 필수 요소인 탁상 사원


목적지가 정해지니 여행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반쯤은 충동적으로 결정된 여행이었고 그래서 출발 날짜는 일주일 후로 잡았다. 준비에는 고작 사흘 정도의 시간을 썼다. KTX를 타고 부산에 가는 게 아니라 해발 고도 3000미터의 부탄에 가는 건데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이 잠시 들었더랬다. 하지만 가끔은 무리해도 별일 없는 게 인생이 가진 또 다른 일면이기도 했다.  


부탄 여행은 현지 여행사를 컨택하는 게 팔 할이다. 인터넷에서 부탄의 여행사들을 찾아 이메일을 보냈고 가장 적극적으로 답메일을 보내고 저렴한 비용을 제시하는 업체를 하나 골랐다. 내가 방문했던 1월은 비수기였다. 그럼에도 일부 여행사들은 성수기 시절의 비용을 제시하는 곳도 있었다. 여행사를 통해 부탄 비자와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여행 일정을 조율했다. 


관광 비수기인 겨울 부탄의 풍경. 성수기 땐 메마른 산과 들이 초록 꽃잎으로 뒤덮인 단다.


한겨울 부탄의 기온은 수치상으로는 서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방한복을 챙기고 러닝화 대신에 아식스의 트레일화를 준비해 군용 더플백에 담았다. 짐을 최소화한다고 했지만 더플백의 무게는 거의 7kg에 가까웠다.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었고 그 가운데 이틀을 공항과 비행기에서 보냈다. 공항은 두 가지 공기가 섞여있다. 공항이 일터인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일상적이고 권태로운 공기와 이곳을 처음 도착한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어색함과 낯섦의 공기. 이런 불안정한 기류 사이에 머물고 있으면 에너지는 쉽게 고갈된다. 한국에서 부탄은 직항이 없고 델리, 방콕, 청주, 카트만두 등을 경유해야 한다. 비행기 환승 대기 시간이 짧아보였던 방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스완나품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은 길고 피곤했다.


새벽에 출발하는 부탄의 국적 항공기인 드룩 에어에 올랐다. 비수기인 만큼 탑승객은 많지 않았다. 타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탄인, 연금을 받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유럽인, 아시아 사람은 나와 중년의 일본인이 전부였다. 비행기는 작았고 좌석의 인조 가죽은 닳거나 실밥이 뜯겨있었고 치킨과 베지테리언 선택 가능한 기내식은 만족스러웠다.

드룩 에어의 기내식. 베지테리언 메뉴에는 고추로 만든 부탄의 전통 음식인 에마다시가 포함된다.

카라라고 불리는 부탄 전통 의상을 입은 스튜어디스는 여느 항공사의 노동자와 다르지 않게 승객들에게 봉사했다. 방콕까지 대한 항공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들의 어떤 모습은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드룩 에어의 스튜어디스들은 그들이 미소를 짓고 싶을 때 미소를 지었다. 어떤 감정 노동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이후에 만난 부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어떤 일상이었다.  


여행 일정은 도착 당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부탄에서의 하루를 위해서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했다. 살풋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히말라야 산맥이 아득하게 멀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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