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수프

by Bal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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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었다. 한 해를 정리하며 조금은 홀가분하고 보람을 느끼는 12월이 되기를 기대했지만, 내 기대와는 다른 12월을 보내고 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질수록 나는 잔잔하고 기댈 수 있는 음악과 영화에 마음이 끌린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으며 피아노와 첼로의 감미로운 선율에 위안을 받고, 또 어떤 순간에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폭 빠져 포근함마저 느낀다.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머리와 마음이 혼란으로 가득할 때에는 영화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을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했다. 넷플릭스로 손쉽게 수많은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지만, 나는 넷플릭스가 등장한 이후로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는 일이 오히려 힘들어졌다. 내가 고른 영화로 ‘시간을 허비했다’는 느낌이 몇 번 쌓이고 나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 낭비를 줄이고자 아주 가끔씩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작품이나 지인들의 추천작만을 보아왔다.


리모컨은 둘째와 남편의 장난감이다.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자신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돌려보는 일상이지만, 어제는 나의 주문으로 영화 한 편을 선택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화면에 뜨는 포스터와 제목만 보고 고른 영화, ‘프렌치 수프’.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잔잔하다. 자극적인 영화만 보아온 탓인지 영화 중간중간 뭔가 자극적인 장치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나의 엉뚱한 상상은 영화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남은 감정은 미술관에서 조용히 그림을 보고 돌아온 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영화의 스토리보다 그림 같은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요리를 보며 감탄사를 남발하고 박수를 치며 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닐 테다. 요리를 하는 주방의 환경은 주방이라기보다 예쁘게 꾸며진 공방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공간에서 요리를 하는 요리사의 모습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같았다.


영화를 보며 남편에게 한 말로 남편은 안심을 했을 것이다.

“자기야, 난 파인다이닝 가면 안 될 것 같아. 코스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막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 칠거 같아. 저런 요리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나올 텐데 감탄을 안 할 수 있겠냐고.”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 스토리가 남았었다. 그리고 그 스토리에 감동을 더해 준 음악이 맴돌아 음악을 찾아 듣곤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렇게 장면 하나하나 남은 작품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늘 같은 후유증이 따라온다.

음식을 만들 때, 맛보다 비주얼에 집착하게 된다. 플레이팅을 예쁘게 해서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플레이팅에 약한 집밥은 하기 싫어진다. 일반적인 집밥은 멀리하고, 보기에 근사한 음식을 하고 싶어진다. 그에 걸맞은 그릇을 구비하고 싶다는 욕구도 함께 부풀어 오른다.

삶에 작은 변화를 주어가며, 프랑스 주방의 흔적을 따라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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