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반도체 후공정은 처음이지?"
"반도체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회사들과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을까?"
2006년 반도체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반도체 업계에 들어와 느낀 첫 감정이다. 반도체라고는 컴퓨터 업그레이드할 때 교체해본 DRAM과 디지털카메라에 사용하던 128MB Nand Flash가 전부였던 내게, 반도체 산업은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마치 오지에서만 살던 사람이 말로만 듣던 마천루의 숲을 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총제적 난국이었다.
중국어를 전공한 문과생의 눈으로 처음 반도체 공정을 접하고는 반도체 양산 공정의 큰 줄기를 파악하고 생소한 반도체 용어들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Fab.이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고가의 장비들을 이용하여 Silicon Wafer를 가공한다. 가공을 마친 Wafer는 EDS(Electric Device Sort) 공정을 거쳐 Back-End라 불리는 후공정에서 패키징 및 최종 성능 테스트를 받게 된다."
큰 줄기만 이해하면 될 줄 알았던 반도체 제조 공정은 사소한 공정에서의 작은 실수가 반도체 수율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자 매사 업무 진행에 혹여 실수할까 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늦은 밤 퇴근한 뒤에는 시간을 내어 이해되지 않는 반도체 공정기술과 관련된 두꺼운 책을 붙들고 읽고 또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에 골몰하지 않고 각 공정에 사용되는 설비 그림이라도 익히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반도체 장비 회사에서 설비 Set up과 유지보수를 위해 국내 업체들의 전, 후공정을 두루 경험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반도체 산업을 이해하는 시야가 넓어져 갔다.
"반도체를 제조 공정을 크게 8개의 공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공정들을 세분화하면 반도체 종류에 따라 600~800가지로 나뉜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 보인다고 한다. 막연했던 반도체 제조 공정을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다 보니 8대 공정이라고 불리는 공정 안에 무수히 많은 세부 공정들이 있으며, 각각의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 소재가 모두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을 알면 알수록 넓디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중, 대만의 반도체 패키징 업체들과 BIB(Burn-In-Board * 반도체 완제품을 평가하기 위한 소켓이 실장된 PCB 기판) 관련 업무를 맡게 됐다. 기존에 맡고 있던 국내, 중국 업체들 외, 대만 BIB 업무를 함께 맡다 보니, 대만의 고객사들이 어떤 회사인지에 대해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차안대(遮眼帶-말 눈가리개)를 채운 경주마 같이 눈앞에 있는 업무만을 쳐내기 급급했다. 대만의 업체들이 왜 BIB를 필요로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신규 BIB가 개발되는지, 어찌 보면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 조차 생각하지 못할 만큼 반도체 후공정 업계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 보면 그때의 대만 고객사들과의 업무 경험이 있었기에 반도체 소재 업체에 조금이나마 쉽게 적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011년 반도체 소재 업체로 이직하여 Glabal 반도체 패키징 업체(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들과 패키징 소재 관련 업무를 하다 보니 반도체 후공정 업계에 내가 알던 Memory 반도체 외,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밀하게 가공된 Wafer를 반도체가 가진 본연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다양한 패키징 방식과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반도체 후공정 시장에 대해 배웠다. 그렇게 10여 년간 반도체 패키징 업체들에게 반도체 패키징용 원자재를 공급하며 그들의 흥망성쇠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반도체 산업을 이해하는 방식에 전환이 있었다. 산업 전체를 무작정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 업무와 연관성이 있으면서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 갖을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반도체 후공정 업계의 원부자재, 반도체 조립 & 테스트 위탁 업체(OSAT)에 대해 중점을 두고 안목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반도체 산업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후공정 업계라는 큰 강을 거슬러 올라 패키징용 원자재와 OSAT라는 하천에 다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A"라는 업체가 만들어 내는 작은 물결이 어떤 의미 인지, 이 물결이 "B", "C"라는 업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약하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