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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짝 Aug 31. 2021

[문화 자국] <라이프>가 그려낸 선우

평범해서 특별했던, <라이프> 속 장애인

2019년 가을에 작성한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

바지를 갈아입는 선우를 도와주는 진우 - <라이프> 1화_비평을 위한 인용

2018, JTBC에서 방영된 16부작 월화드라마 <라이프>에는 주인공 예진우(이동욱 분) 동생 예선우(이규형 분) 등장한다. 선우의  등장은 사진과 같다. 진우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보니 선우가 몸을 한껏 구부려 신발을 벗고 있다. 선우가  안으로 들어가고, 진우는 선우의 신발을 낮은 신발장에 올려놓는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틀며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선우, 진우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선우를 들어준다.

선우의 퇴근 후(신발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일)는 진우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차이는 선우가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후로도 <라이프>는 곳곳에서 선우를 통해 시청자에게 장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장애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라이프>가 그려낸 선우는 다른 작품들과 달랐다. 작품이 얼마나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있는지 알기 위해 고안된 티리온 테스트(Tyrion Test)라는 것이 있다. 티리온 테스트의 세 가지 조건은 아래와 같다.

장애는 현실적으로 묘사되며, 실제보다 덜하거나 심하지 않은가?

한 명 이상의 장애인 등장인물이 극 중 주요 줄거리에 관여하되 여기에 장애가 주요소로 작용하지 않는가?

장애인이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닌 도움을 주기도 하는가?

이 테스트의 항목을 빌려 <라이프>가 장애인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장면 속에 녹아있는 장애인의 현실

아래로 내려오는 싱크대 선반 - <라이프> 9화_비평을 위한 인용

<라이프>는 장애인의 일상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선우네 집 문턱에는 휠체어가 오를 수 있게 받침대가 괴어져 있고, 거실 입구엔 밖에서 탄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더럽히지 않게 매트가 깔려있다. 장롱 앞엔 높은 데 걸린 옷을 꺼낼 때 쓰는 끝에 고리 달린 막대가 있고, 싱크대의 선반은 아래로 내려온다. 장애인인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뿐 아니라 소품들도 현실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물의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여느 드라마처럼, <라이프>도 선우의 일상을 통해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삶을 보게 한다.

엄마와 식당에 간 선우  - <라이프> 5화_비평을 위한 인용

<라이프>는 단순히 일상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애에 대한 사회의 시선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선우가 엄마와 함께 식당에 가는 장면에서, 안쪽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식탁 사이를 지나가는 선우를 사람들은 힐끔힐끔 쳐다본다. 일부는 수군 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장면이 있었기에 나중에 형과 식당에 가며 “사람 많고 복잡하면 좀 그런데”라고 말하는 선우의 감정을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한다. 흔히 드라마 속 인물에 이입하듯, 시청자는 선우의 감정에 공감함으로써 자신은 현실 속의 선우에게 식당의 사람들 같은 존재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라이프>에 나타난 선우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기회를 얻는다.


갈등의 핵심인물인 선우, 그러나 장애는 소비되지 않았다.

부원장의 과잉의료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우와 승효  - <라이프> 9화_비평을 위한 인용

선우는 장애인이라는 단순한 설정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드라마는 신자유주의에서 의료시스템이 가야  길을 논하고 있는데, 병원으로 돈을 벌려는 상국대병원의  총괄사장 승효(조승우 분) 의료기관의 마지막 가치를 지키려는 응급전문의 진우의 갈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야기에서 선우는 대학병원을 심사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 근무하는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갈등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진우와의 형제 관계로 병원과 심평원을 연결하는 선우는 드라마의 플롯에 항상 등장하며, 부원장의 과잉 의료자료를 조사하다 대리수술 정황을 발견하는   다른 플롯을 생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우가 줄거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선우의 장애가 극적 갈등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난 그냥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선우  - <라이프> 14화_비평을 위한 인용

드라마에서 장애인이 장애를 특징으로 쓰지 않으며 동시에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일은 흔치 않다. <라이프> 선우를 보며 <태양의 후예> 표지수(현쥬니 분) 떠올랐다. 표지수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지만 남부러울  없는 쿨한 유부녀라는 캐릭터 소개처럼, 드라마에서 표지수라는 인물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씩씩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인물이었음에도 <태양의 후예> 장애를 표지수의 성격을 나타내는  소비했다. 하지만 <라이프> “,  보면서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 너처럼 포기 않고 끝까지 공부하고 직장도 가진 사람 몇이나 되겠어   사람들한테 희망이야라는 진우에게 “내가  그래야 하는데?   삶이 누군가한테 용기를 줘야 하는데?  그냥 사는 거야라는 선우의 대답을 통해 장애가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 아닌 하나의 상태임을 말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동명의 책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의를 가지고, 차별과 혐오의 발언을 내뱉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라는 책에선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을 동정, 봉사, 극복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장애인이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봉사’라는 시각에 의한 것일 거다. 책에선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라이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같고, 선우를 봉사의 시각으로 보는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때 시청자는 아이러니함을 느끼는데,  인물이 이노을(원진아 분)로 주인공 진우의 아주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중에서 노을이는 진우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   명이며 병원의 경영에 관련해서 몰인정한 승효에게도 따뜻함이 있을 것이라 믿는 순수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을이가 선우를 대하는 모습에서 시청자는 불편함을 느낀다.

괜찮다는 선우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노을  - <라이프> 3화_비평을 위한 인용

노을이는 배웅하고 싶어 하는 선우에게 나오지 말라며 말리고, 다리가 시리면 안 된다며 선우가 괜찮다는 데도 담요를 덮어주는 등 선우를 약자로만 대한다. 노을이에게 평범한 남자가 되고 싶은 선우가 상처 받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 악역으로 그려지는 부원장이 대놓고 선우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것보다 시청자에게 더 큰 인상을 준다. 선우가 사람들의 시선에 좋아하는 바다를 가지 않는다는 진우의 말에 노을이는 화상 입은 아이들을 향한 시선도 그렇다며 함께 분노하지만, 곧 또 선우를 혼자 두지 말라며 진우를 들여보낸다.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이 장애인에게 현재 삶에 희망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모욕적인 말이라고 한다. ‘너도 너무 선우 어린애처럼 보지 마. 남들이 대놓고 쳐다보는 것보다 네가 그러는 게 걔는 더 아플 거야’라는 진우의 마음처럼, 선의로 행한 친절이 받는 사람에겐 상처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마치며,

프리다이빙을 즐기는 선우와 진우 - <라이프> 16화_비평을 위한 인용

마지막 회에서 선우와 진우는 휴가를 내고 바다로 가 프리다이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갈등이 종료되고 시골로 간 노을이와 병원을 떠난 승효처럼, 선우의 마지막도 장애를 극복하지도, 장애에 굴복하지도 않고 여느 동화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였다.

처음 퇴근하는 선우의 모습부터 마지막 바다 여행까지, <라이프>가 그려낸 선우를 통해 우리는 드라마 속 인물들과 함께 존재하는 선우처럼 우리 사회에 함께 존재하는 장애인을 인식할 수 있었다.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1969년부터 방영하고 있는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에는 방송 초기부터 장애인인 캐릭터가 등장해왔다고 한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미국에서 장애 아이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아이들 프로그램에서 다양성을 반영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듯이, <라이프>의 선우를 시작으로 한국의 드라마에서도 장애인이 당연하게 등장하기를 바란다. 너무 당연해서 티리온 테스트나 이런 글들이 쓰이지 않게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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