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트 크로우> 리뷰
✔ 영화 속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면 무용을 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스승 알렉산더 푸쉬킨(Alexander Pushkin)도 그랬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춤의 목적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그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꽤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정작 그 장면을 보며 영화 <화이트 크로우>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영화도 그들의 대사처럼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전할지 생각하고 만든 고민의 결과물일 텐데, 이 영화의 메시지는 왜 읽히지가 않을까 하고 말이다.
✔ 루돌프 누레예프의 전기영화 <화이트 크로우>는 그의 망명을 그리고 있다. 흑백으로 묘사되는 우파에서의 유년기, 그의 스승을 만나게 된 레닌그라드 발레 학교 시절, 인생의 전환점이 된 프랑스 공연을 거쳐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와 가치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시기들을 오간다. 그리고 전개되는 장면들을 통해 냉전시대에도 자유로이 춤을 추고자 했던 그의 열망, 별종이라 불렸던 그의 남다른 언행, 그가 간직했던 특별한 기억들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20세기 발레 스타 루돌프 누레예프의 전반기를 훑어볼 수 있는 영화다.
✔ 하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을 훑으면서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졌다. <화이트 크로우>는 ‘스타 발레리노의 망명’이라는 대주제 안에서 누레예프의 가치관, 배경,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관련 에피소드를 최대한 모아놓고 주르륵 늘어놓은 것만 같았다. 물론 누레예프의 삶과 망명은 그리 간단하진 않다. 하지만 주된 메시지는 정했어야 했다. 제목처럼 ‘화이트 크로우’로 불린 그의 기행에 주목하거나, 유명 발레리노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심리에 집중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의 망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거나. 하지만 영화 <화이트 크로우>는 너무나도 많은 그의 이야기를 흐릿한 초점으로 바라보고 그저 보여줄 뿐이었다.
✔ 게다가 그의 발자취를 찬찬히 따라가 몰입할 때쯤이면 어느새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최소한의 의미를 생각할 시간조차 무심히 지나쳐가는 불친절한 전개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장난감 기차에 집착하던 그에게 기차란 어떤 의미인지, 푸쉬킨의 아내와 갑작스러운 관계를 맺을 때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와 연출이었다. 때문에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영화의 메시지는 희미해졌다.
✔ 세계 발레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이자 반항아, 루돌프 누레예프. 러시아의 발레 문화를 서유럽에 전파하고 발레리노의 위치와 역할을 재정의한 스타 발레리노지만, 한편으론 춤과 신념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일 정도로 마이웨이를 고집하던 별종이었다. 이렇듯 복잡 미묘했던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아쉽게도 충족되지 않았다. <화이트 크로우>를 보며 실제 무용수 및 배우들을 통해 누레예프의 체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보았을 뿐이다. 루돌프 누레예프는 한 명의 춤꾼 그 이상이었기에, 그의 남다른 행보가 무용계에 어떤 의미였는지 알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The main thing is dancing, and before it withers away from my body, I will keep dancing till the last moment, the last drop.
- Rudolf Nurey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