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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1. 도피를 꿈꾸다.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2023년 가을.


관리자 B가 사무실 한복판에서 나를 향해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그동안 내가 꾹꾹 눌러 담아 온 모든 감정이 무너져버렸다.

그녀의 기침 하나에도 따뜻한 차를 올려두던 내가,

그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무실 화분을 돌보던 내가,

너무 한심해졌다.

그렇게 나는 직장에서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내가 하루 동안 회사에서 하는 말은 세 마디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 외의 시간에는 그냥 숨을 참는 기분이었다.
죽고 싶다는 말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했다.





‘어떻게 죽을까’에서 ‘어디로 도망칠까’로
생각이 바뀌던 날, 나는 퇴근길에 여권을 신청했다.

그건 나의 작은 다짐이자 생존 본능 같은 거였다.

여권이 나오자마자 비행기표를 샀다.

목적지는 대만.

첫 번째는 메르스로, 두 번째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계획이 무산되던 나라.

그래서 더 간절하게 그곳이 가고 싶었다.



36살. 퇴사자. 미혼. 여권 하나 들고 비행기표 한 장을 손에 쥐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죽음 대신 여행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의 야시장, 화롄의 바람, 타이동의 바다.

조만간 다가올 나의 미래를 상상하며, 오래간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도피 아니냐"라고.
맞다. 도피다.


하지만 이 도피에 나는 하나의 형용사를 더 붙이고 싶다.

찬란한 도피.


찬란하다 燦爛하다 / 粲爛하다

빛이 번쩍거리거나, 수많은 불빛이 빛나는 상태.
그 빛이 매우 밝고 강렬하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이 도피는 나를 살렸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는 나를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Ep.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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