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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2. 실수해도 괜찮아.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퇴사하는 날.


나는 내심 관리자 B의 말 한마디를 기대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였으니, '그동안 수고했어요.'라는 말쯤은 듣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다른 직원들도 나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그럼 그렇지, 이 사람들과 이 조직에게서 뭔가를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리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업무 문제로 전화도 하지 마라. 메신저도 하지 마라. 내가 답변을 해주나 봐라.

사무실 책상 서랍에 있던 아기자기한 볼펜, 달달한 간식거리까지 모두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함께 쓸려나간 건, 이 회사에 남아 있던 마지막 좋은 감정들이었다. 즐거웠던 추억조차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돌아선 순간,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동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생각들이 깔끔하게 걷히고, 흐렸던 시야가 맑게 개는 기분.

나는 비로소 진짜 떠날 준비가 되었다.




대만으로 떠나는 날.

아침 8시 4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긴장 때문인지 몸이 무겁고, 잠을 설친 탓에 뒷목이 뻐근했다.


우리 집에서 청주공항까지는 급행버스로 약 1시간 거리.

인터넷에서 5시 40분 청주공항행 버스를 확인해뒀지만, 도착한 순간 버스는 눈앞에서 떠나버렸다.

영하 8도의 칼바람 속, 나를 배웅하겠다며 터미널까지 나온 엄마는 버스 시간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셨다.

사실, 짐이 무거워서 처음부터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이른 새벽에 배웅까지 나오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나는 슬그머니 엄마 눈치를 보다가, 6시 27분에 도착한 747번 급행버스를 서둘러 탔다.


예상보다 30분가량 늦은 출발이었지만, 새벽 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공항에는 오히려 여유 있게 도착했다. 마음 속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청주공항은 작고 한산했다. 발권을 마치고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다녀와, 대만 가서 실수하지 말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


엄마는 나의 실수를 걱정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염려하는 마음인 건 너무나 잘 알지만, 그 말이 자꾸 잔소리처럼 들렸다.


실수가 뭐 어때서?


나는 그동안 실수하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작은 실수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봐 전전긍긍했고, 나 자신을 책망하며 밤잠을 설쳤다.

사람들이 나를 '한심한 사람'으로 여기며 어쩌지?

작은 실수 하나로 나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닌지 늘 불안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두려움은 나를 더 각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느새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했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그 누구보다 실수에 예민했던 내가, 실수에 가장 가혹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 실수가 작건 크건, 사람은 그 안에서 배우고 자라난다.

실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방향을 틀어주는 작은 이정표 같은 것이다.


다음번에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실수를 줄여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실수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그 속에서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고, 누구나 실수를 하며 성장하는 거니까.


내가 아무리 대만에 대해 공부를 했어도, 이곳은 여전히 낯선 나라이다.

중국어를 10년 넘게 배웠지만, 오랫만에 쓰는 말은 어색할 테고, 낯선 길, 낯선 문화에 수많은 실수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안 갈 수 있나? 실수를 피할 수 없다면 일단 부딪치는 수밖에.






비행기를 타기 전, 감기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 빵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약 때문에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졸음이 밀려왔다.


잠시후, 탑승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의 기내 안전데모를 자장가 삼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대만의 하늘 아래였다.

아!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대만이다!


한 달 동안 잘 부탁해!


분명 이 여행은 어설프고, 실수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 모든 실패와 서툼 속에서 나는 성장할 할테니까.


실수마저 나를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나의 찬란한 도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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