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문서 유출사건 속 치열한 워싱턴
기대하진 않았지만 물어는 보았다.
"어? 펜타곤도 투어 할 수 있어?"
묵고 있던 숙소 셔틀을 잘못 탔나 했는데 종점인 펜타곤 환승센터에 내려줘 펼쳐진 상황이었다. 귀에 익은 건물이라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길래 혹시나 싶어 무장 경비에게 물어본 것. 그러나 대답은 No.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신청은 시민권자에 한해 90일에서 두 주 전 미리 사이트를 통해 정확한 신원을 입력해야 한단다. 휴대폰, 스마트워치, 카메라를 비롯해 어떠한 전자기기의 소지 또는 보관이 안되고 1시간 정도 일찍 가 보안 체크를 해야 한다고. 내가 방문했던 그 어떤 곳보다 까다롭다 싶었지만 명색이 미국 국방부 청사인데... 생각하며 돌아선 게 보름전이다. 그런 삼엄한 장소가 전 세계 뉴스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국가 기밀 감청 기록이 유출된 건으로 말이다. 오늘 확인해 보니 모든 투어 중단 안내가 올라와 있다.
난감해진 바이든 정부
용의자의 체포 장면은 헬기에서 찍은 방송 카메라에 생중계됐다. 전 세계를 발칵 뒤집은 NYT 보도 일주일 만에 만에 매사추세츠 외곽 자신의 집에서 체포된다.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미 공군 국가 방위군은 빨간 반바지의 겁에 잔뜩 질린 용의자를 수갑 채워 호송차에 올랐다.
잭 테이세이라, 케이프 코트에 있는 공군 방위군 기지에 주둔하는 공군 방위군 소속의 21살 일등병. 사이버 방어 작전 하사관 직책으로 19살이던 2021년에 일급 기밀 보안 허가를 받았다. 다른 기밀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는 정부 기밀 정부 문서를 유출하고 게임사이트에 공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처음 유출된 사이트 이용자에 따르면, 용의자는 서버에서 Jack이란 실명으로 활동하면서 정부 기밀문서를 취급하는 자신의 직책도 숨기지 않았다. 2022년 12월경부터 게임 플랫폼 서버 중 하나에 기밀 정보를 게시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문장 형식으로 올리다 올해 1월부터는 기밀표시가 있는 공식 정부 문서의 사진을 게시했다고. 문서 내용을 필사하다 적발될 것을 염려해 사진을 찍기 위해 집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는 말도 전했는데 테이세이라가 올린 서류 사진 배경엔 자신의 집 식탁과 주방 타일이 보인다.
"나는 유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발생한 것은 문제지만 내용상 큰 문제가 있는 건 없어 보입니다."
국빈방문 중인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기자의 질문에 짧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든 정부에게 지금 이 상황은 물가나 트럼프보다 더 큰 악재로 보인다. 타국에 대한 지속적인 도청 사실과 그 민감한 내용을 어이없이 유출시킨 당사국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이번 유럽 방문은 1998년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다시 한번 미국이 세계 분쟁의 중재자임을 리마인드 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터진 감청과 기밀 누출 뉴스가 그 모든 긍정적인 효과를 덮어버렸다. 25년 사이 달라진 미국의 위상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을 뿐이다.
워싱턴의 숨 막히는 외교 전
도청 문서 유출 후 외교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각 나라 간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제일 먼저 목소리를 높인 건 폴란드. 카멀라 부통령을 비롯한 관리들과 IMF 등과의 회담을 위해 DC를 방문하고 있던 폴란드 수상은 적극적으로 미국 언론을 만나 외교 전을 펼치고 있다. NYT, NBC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조치를 이해하고 지켜보자고 말하며 자국의 골칫거리를 언급한다
"전 (폴란드 국민들의) 피로가 걱정됩니다... 우리 (폴란드) 농민들 사이에는 많은 불안과 우려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큰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폴란드는 지난 14일, 우크라이나에서의 곡물과 기타 식품 구입 금지를 결정한다. 흑해 항구 봉쇄 후 판로가 막힌 싼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대량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EU 지역 농민들의 분노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럽 나라들이 관세 인상 등 갑론을박하는 사이 폴란드는 자국 농민들의 숙원과제를 빠르게 처리한다.
이 조치엔 헝가리도 함께했다. 유출된 CIA 문건 속에서 미국은 헝가리에게 3대 적국으로 묘사됐다. '반미 표현'에 수준이 높아졌다고도 기록됐다. 같은 나토회원국이지만 러시아, 중국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그동안 헝가리는 미국과 긴장상태였다. 문건 유출은 헝가리를 홀가분하게 해 준 모양새가 됐다.
이스라엘 정부도 반색하는 모양새다.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대 시위로 좌절됐던 '사법 쿠데타' 시위에 모사드가 있었다는 누출 문구 때문이다. 네타냐후에겐 반전의 호재가 될 수 있게 된 것. 더불어 우방국을 도청한 바이든 정부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다.
"미 언론에 보도된 보고서는 아무 근거 없는 엉터리며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네타냐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나 정치 참여를 직원들에게 독려하고 않았고 지금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공식 성명을 냈다.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은 미 고위 관리들이 직접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며 과잉반응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한국 전기차는 못 받는 $7,500
외국 정상중 가장 열심히 도청 문서 유출에 관해 발언하고 있는 폴란드는 4월 12일 NYT 인터뷰에서 특별히 한국을 언급한다.
"우리는 무기 인도와 탄약 전달에 대해 한국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러시아의 반응과 중국의 반응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폴란드가 한국과의 합의 없이는 절대무기를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에서 많은 무기 시스템을 구매했다는 걸 상기시켰다.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보낼 포탄을 한국에서 구매하려면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덧붙인다.
지난 17일, 미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발표가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차 계약을 연기하며 이 날을 기다렸다. 대당 $7,500 보조라니. 전기차 시장 판도가 바뀔 금액이다 싶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이들도 있다. 현대 아이오닉을 타고 싶어 하는 내 친구 같은 이들이다. 이번 리스트엔 한국의 기아와 현대차가 빠졌다. 미국에서 급성장하던 한국자동차 시장에 큰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도청에 탄약 수출에... 아오, 이번엔 미국이 성의를 보였어야지!!"
높은 이율의 집 모기지를 내고 있는 친구는 아마도 미국산 전기차를 구매할 것 같다. 미국에 배신당하고 폴란드에 뺨 맞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에 외면을 받고 있는데 설마 러시아의 공격까지 받는 일은 제발 없기를 기도한다. 글로벌 호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