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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May 23. 2018

심연의 공명

북리뷰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맨부커상)- 다비드 그로스만


“하지만 왜 ‘판결’이라고 해?”
전화기를 통해 베일 것 같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냥 내 쇼에 와, 잠시 나를 봐줘, 정말로 그게 다야. 그런 다음에 말해줘—하지만 나를 동정하지는 마, 그게 중요해—나한테 두세 문장만 말해줘. 나는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내가 너를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p.102


도발레 G. 그는 40여 년 만에 아비샤이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와서 자신을 ‘봐’ 달라고 부탁한다. 공연을 보고 네가 본 나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네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거리가 궁금한 순간. 오해와 이해와 외면과 설득과 재단과 질문과 절망과 환희와 침범과 유대와 거부와 이끌림과 어째서와 그래가 뒤엉켜 발아하는 곳. 나와 네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공존해야만 굴러가도록 설계된 생의 필연적인 연극성으로, 모든 영혼들이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타자의 지옥 어디쯤.  


생동하는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한다. 과거의 어느 날, 하늘 언저리에 끼워두었던 퍼즐의 파란색 피스가 사실은 바다였는지도 모를텐데. 어쩌면 아비샤이를 곧게 바라보던 도발레의 파란 눈동자였는지도. ‘무엇’에 대한 정의는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나의 방식, 나의 메타포의 한계에 따라 양도 질도 달라진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밖에 되지 못한다. 색색으로 가져다 붙이는 타인에 대한 정의 역시 나를 보여주거나 정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그러나 입을 멈추지도 못한다. 주로 나를 위해, 아주 가끔은 ‘너를 위해—라는 착각’으로 살을 붙이고 또 붙인다. 말인지 무엇인지 모를 그것에 무작정 양심을 기대할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코미디 중이니까. 한 여자와 이어진 얇은 줄로 그녀의 피와 살을 갉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양심을 인간의 본능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점을 찾을 수 없는 검은 궤적이 그림자처럼 뒤꿈치에 매달려 따라온다. 지난 궤적들이 얽혀 저만치에 까만 호수가 있는 것 같이도 보인다. 내가 살아있다는, 살아있었다는 흔적이며 나의 심연이 살고 있는 고독이다. 좋든 싫든 그것은 ‘내 것’이며 여기에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검은 덩어리를 마주 볼 때면 나는 가끔 그것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진다. 또 어느 날은 요람처럼 편안해 그 안으로 더 안으로 침잠하고 싶어 진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침범되어서도 안되며,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


책장이 넘어갈수록, 우스개와 비례하게 촘촘해지는 한 인간이 가진 고독의 밀도에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심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아가리를 찢는다. 누군가의 생이 온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존재를 타고 진동하는 너의 심연에 나의 심연이 공명하며 입천장을 간질이는 것. 그 울림에 목구멍이 뻐근해져 오는 것. ‘너의 인생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본다.’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 외에 다른 수식이 덧붙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마는 것.


생은 틀림없는 비극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죽음의 징조이듯 죽음의 징조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가 된다. 살아있는 한 어떤 일이든 벌어질 것이고, 그 일이 무엇이건 간에 어떤 의미이건 간에—불가해한 생의 잘은 편린쯤은 이해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희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생의 비극 안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꽤 기쁘다. 도발레의 말을 빌려본다. “괜찮아, 나를 믿어. 어딘가에는 그런 문장이 말이 되는 우주도 있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쇼는 끝났지만 계속되는 생의 코미디에 울지 않거나 울 수 없는 도발레를 대신해서. 그러면 그는 창 유리에 반사된 아비샤이의 영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영혼을 팔기 좋은 날씨야! 내 말이 맞아, 아니면 내 말이 맞아?”




"존경한다, 피카소, 대단하더구나, 내가 너라면 서둘러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 말 들어, 어딘가에서 대접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기 없는 거란다, 알아듣겠니?(...) 정말이지 죽음이라는 개념 전체의 밑바닥에 깔린 아이디어가 그거 아니야?” p.44


"생일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결산을 하는 날, 영혼을 탐색하는 날이야, 적어도 영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지만, 현재 나의 상태에서, 나는 영혼을 유지할 자원이 없어.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영혼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정비해줄 것을 요구하잖아, 안 그래? 절대 끝나지를 않아! 매일, 하루 종일, 영혼을 끌고 들어와 손을 봐줘야 해. 내 말이 맞아, 아니면 내 말이 맞아?” p.54


“하지만 봐, 네타니아! 오십칠 년이라는 더럽게 긴 세월 동안 의리를 지키고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라고. 도발레가 된다는 실패한 기획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부지런하게 달려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봐! 아니, 누가 되는 건 둘째치고 그냥 살아 있자는 기획에!”(...)“그냥 살아 있자는 게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지 이해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지?” p.63


"인생이란 이렇게 되고 마는 거야. 인간은 계획하고, 신은 그 인간을 좆같이 망쳐버리지.” p.64


나는 깊고 어두운 기만을 느낀다, 말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기만. p.72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어리둥절하다. 냅킨에 얼른 기록해 질서를 잡으려 한다. 내가 알던 소년. 여자가 알던 소년. 무대 위의 남자. p.81


"요아브 말이 절대적으로 옳아, 정치는 안 돼! 어차피 우리 애들이 크고 나서야 일어날 일이고, 따라서 걔네들 문제지. 게다가 누가 걔네들한테 우리가 싸질러놓은 걸 먹으며 여기 눌어붙어 있으라고 했나? 그러니 왜 지금 그것 때문에 짜증을 내겠어? 왜 싸우고 말다툼하고 내전을 벌이겠어?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생각 같은 걸 해? 생각하지 않는 것에 두 손 모아 박수를!” p.92


“내 말은, 있잖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나를 볼 때 뭘 알게 되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볼 때? 내 말 알아듣겠어? (...) 내가 거리에서 걷다가 어떤 사람을 지나친다고 해보자고. 그 사람은 나를 본 적이 없어. 나를 전혀 몰라. 처음 보는 거지-쾅! 그 사람이 뭘 파악할까? 그의 마음에 나에 관해 뭐가 기록될까?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에 널 본 적이 있는 걸.” 내가 지적했다.
“오래됐잖아.” 그가 즉시 말했다. “나는 내가 아니야, 너도 네가 아니고.” p.104


“그래, 아버지는 물구나무로 걷지 말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어. 하지만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어.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구하지?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해야 이런 직립성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느냐는 거야. 어떻게 살아 있을까? 그게 당시 내 마음이 움직이던 방식이야. 나는 늘 그런 불안이 있었지......” p.131


유혹. 다른 사람의 지옥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래전에 일어나서 자리를 떴거나, 심지어 야유를 보내 그를 무대에서 쫓아버렸을 것이다. p.134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게 나의 위엄인지 수치인지 오래전에 잊어버렸어.” p.217


"운전병 말이 옳았어. 나는 울고 있어야 했어, 그게 고아가 하는 일이니까, 안 그래? 아니면 반쪽짜리 고아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내 몸은 그림자 같았어. 아무런 느낌이 없었지. 게다가,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진짜로 알기 전에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어. 그렇지 않아?”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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