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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May 11. 2021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s

뮤즈에게는 도덕이 없다


뮤즈에게는 도덕이 없다. 그는 차라리 도덕을 파괴하는 자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침입으로 사유를 휘저으며 미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인간의 영역 너머에서 군림하고 약탈하며 지워지지 않는 흔을 새겨 넣고 홀연히 사라지는 존재.


예술가는 예측할 수 없는 결락의 구덩이에서 존재의 의미와 신의 얼굴을 발굴한다. 작품은 때때로 굽이진 머리칼의 에로스로 현현하지만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 이들은 그들 스스로 타나토스적 신화가 된다. 


< 엘런 긴즈버그 '어떤 것들'/ 자필: Brause Steno x Pirot Iroshijuku Yama-budu >


킬 유어 달링. 문학에서는—네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 문장이 서사를 방해한다면 그것을 지워라—쯤의 의미가 되겠다.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등의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이어진 비트 세대의 ‘비트’를 만든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잭 케루악 그리고 그들의 뮤즈 루시엔 카의 이야기.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지만 각색 때문에 욕을 꽤 먹고 있다. 게다가 루시엔 카는 생전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렸는데, 긴즈버그가 출간하려는 시집에서 감사의 의미로 루시엔 카를 언급하자 지워달라고 요청할 정도. 그의 가족들도 영화를 보고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찾아보니 루시엔 카의 캐릭터 왜곡이 고인 능멸로 보일 정도로 상당하고, 메인 사건을 다루는 영화의 시선이 사회적 논란이 되기 쉬운 지점을 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납득 가능한 해석이라 내러티브에서 느껴지는 불편은 없었지만 루시엔 카의 가족들의 항의에는 동감하는 쪽.



영화를 종합예술로 대할 때 시대의 모럴로 작품의 서사를 재단하는 것은 분명 폭력이지만 그것이 실화에 근거할 때에는 분별력을 앞세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실화 속에는 현실세계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내러티브는 현실 세계에 사는 감독의 해석이다. 역사란 결국 기억이고 또 그것은 개개인의 해석일 뿐이겠지만, 그 해석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 올리는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 본인의 의지일 때만 용납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우리 시대의 도덕률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토탈 이클립스로 랭보와 베를렌느의 서사가 널리 알려지자 프랑스 시민들이 랭보의 묘를 그의 연인과 함께 있도록 수많은 위인들이 잠든 묘역 ‘팡테옹’으로 이장하자는 청원을 냈다. 그러나 마크롱은 랭보의 후손들의 의사를 반영해 이장을 하지 않겠다는 서한을 그들에게 전했다. 고인이 된 랭보와 베를렌의 진실을 가늠하는 일 보다, 오늘 살아있는 후손들(랭보와 가장 가까웠던)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2021.05.11

©이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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