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양평 사람들
<성공한 어른>
"나 아무래도 성공한 어른 같아." 공유 카를 빌리며 친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평일에 휴가를 내고 차를 끌고 양평에 가서 브런치 모임이라니. 꽤 그럴듯한 어른의 삶 아닌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 때 갈 수 있는 사람,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낼 결정권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잘컸다.
<그린카>
이번 양평 여행에 목숨을 걸었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려나. ITX를 타고 갈 수 있지만 구태여 그린카를 빌려서 양평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옆자리를 비운채 혼자서 긴 거리를 운전해 보는 도전을 무사히 해낸 스스로에게 손과 발을 모두 모아 박수를 쳐주고 싶다.(운전 무용담은 차마 브런치에 담을 수 없으니 개인적으로 묻길 바란다. 그냥 묻어버려도 될 이야기기도 하고.) '초보운전'을 붙이는 것을 깜빡한 기만적인 느림보를 만난 수많은 운전자 분들께 이 영광을 함께 돌린다. 자기 효능감, 자신감, 자존감과 같은 것들이 뭐 별건가.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는 일이라도, 누군가는 "안돼!"라고 말하는 것일지라도 스스로의 한계에 맞서 보면서 얻어지는 그 조금이다. 오늘 무려 65km를 달렸다고. 빠방!
<초대>
올해 초 알게 된 풋잠 커뮤니티.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풋잠을 만난 것도 풋잠의 호스트 박하님의 초대 덕분이었다. 생면부지인 나를 그는 어쩌자고(?) 자신이 만든 판에, 울타리에, 공동체에 발 들이게 한 것일까. 수고하여 만들고 애써 지속하고 있는 자리에 누군가를 기꺼이 초대하는 일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싶다. 사실 기획가 이자 탁월한 실행자들에게 가장 쉬운 것은 그 모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로만 팀을 구성하여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원래 자리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잔치에 초대하는 순간,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부인들에게 안 해도 될 설명을 해야 하고 초대된 이를 환대하기 위해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초대의 과정부터 운영하는 모든 면면이 더 어려워지고 복잡하지고 더뎌진다. 그럼에도 이런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커다란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로 올리는 일의 고됨을 알면서도 이 어리석은 일을 하는 원동력은 그에게 물어보시길 바란다. (insta @theater_puppynap)
<좁은 세계>
오늘 양평에 간 것은 '미술관 브런치'라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842. 주소마저 생경한 그곳엔 커다란 창고형 작업실에서 미생물과 토양, 식물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 농업을 하고 계시는 '초필당' 그리고 철을 녹여 작품을 만드시는 예지 작가님을 만났다. 고급 코스요리처럼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늘도 아이폰 메모장에 필기가 한가득 차려졌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자연이 좋아서, 보다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찾아서.. 다양한 이유로 양평에 정착한 분들의 삶의 이야기는 좁디좁은 서울러의 세계에 새로운 틈을 벌렸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가 모인 서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서울 밖에서 보는 서울은 인간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대단한 사치를 부려야 하는 요상스러운 곳일지도 모른다.
<풀을 먹는 행위>
식탁 앞에 놓인 야채와 풀들의 향을 하나하나 맡으며 토끼처럼 풀을 씹어 먹었다. '찰지다'는 말로는 어림도 없는 토마토의 놀라운 식감과 크지도 않은 눈을 눈썹을 잔뜩 밀어 올려 동그랗게 뜨게 하는 레몬 바질의 향은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직도 그 향이 아찔하게 맴돈다. 나름 원재료를 손으로 다듬는 일을 좋아해서 요리를 자주 하는 나인데, 지금껏 내가 만져온 것은 가공에 가공을 더한 것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풀 앞에 잔뜩 식탐을 냈다. 하얀 당근을 토마토 잼에 발라 오도독 씹어 먹으며 진짜 땅에서 난 것을 먹는 감각을 만끽했다. 언젠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희대표 언니,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희블리 언니도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 생각한 시간, 한 마디로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게 하는 식탁이었다.
<예술>
초필당(초록이 필요한 당신)의 세훈님은 일주일에 약 10만 원 정도의 책을 사들이고 있는 책 덕후라고 하셨다. 어쩐지 흙의 미생물 속에서 인간과 공동체의 본질을 엮어내는 그의 통찰이 예사롭지 안 다했더니 직접 땅을 밟으며 익힌 현장력과 다양한 책의 세계에서 얻어진 사유의 힘이 잘 버무려져 영양분이 가득한 것이었다. 땅에서 난 철로 말을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예지 작가님도, 땅에 살아있는 생물로 그림을 그리는 초필당도 모두 예인(예술의 '예'는 심을예 이기도 하다.)이라고 이야기하는 세훈님의 삶도 풍성함이 넘쳐 보였다.
<미생물>
세훈님께들은 미생물학(?) 개론은 전공필수와 필수 교양 사이쯤에 있는 내용이었는데, 진짜로 대학교에 있는 수업이었다면 반드시 A+을 맞아서 교수님과 친해지고 싶은 인기 과목이었을 것 같다.
"재밌는 건요. 남에게 도움만 받는 미생물은 변화에서 쉽게 소멸합니다. 공생이라는 것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우리보다 더 오래 이 세상을 살아왔을 미생물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단어는 어떤 말을 하던 반복하는 습성이 있는데(내가 '기쁨'이란 말을 어디서나 희희하게 밝히는 것처럼) 세훈님의 삶에 지금 중요한 것은 '공생'이라는 말 같았다. 그가 지금 우리에게 땀 흘려 배운 것을 나누고 있듯이.
<존엄하게 산다는 것>
나는 읽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어떤 텍스트를 만났을 때는 삶이 진동하듯 바뀌기도 한다. 요즘 나를 쥐고 흔드는 책은 게랄트 휘터라는 독일의 살아있는 지성이라 불리는 뇌과학자, 게랄트 휘터의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가', '무엇이 인간으로부터 존엄을 빼앗는가',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묻고 또 묻고 있다. 오늘 문호리에 와서 양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며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다. 내 손으로 뿌린 씨앗에서 작물을 길러내고, 인간을 해치지 않는 것들을 먹고, 흙 속에서 그리고 흙과 함께 사는 것들과의 공생을 고민하고, 둘러앉아 따뜻하게 먹고 마시는 일. 서로의 지금과 앞날을 진중하게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 존엄하게 사는 사람들은 기미마저 인장이라고 부르는 소박한 넉넉함이 있다.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도록, 소속감 속에서도 자신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자율성을 가진 주체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만남 말이다. 이러한 특별한 만남을 사랑이라 일컫는다"<존엄하게 산다는 것>
<삶으로서의 죽음>
예지 작가님이 던진 화두는 '죽음'이었다. 자주색 털모자를 쓴 해맑은 얼굴로 이런 묵직한 말을 던지다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런류의 대화를 짜릿해하는 김 모 씨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은지 씨는 죽고 싶었던 적 없어요?"
"물론 있었죠."
"그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요?"
"제게 죽고 싶었던 고통, 제가 통제할 수 없이 찾아왔던 고난은 저를 기어코 각성시켰어요. 우리는 어떤 때 기쁨을 빼앗기는가,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 봤어요. 혼자 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어요. 죽음이 기쁨으로, 공동체적 회복을 이룬 셈이죠.
"맞아요. 때론 죽음이 그렇게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행위자>
약 3시간 정도 이어진 브런치를 마치고 초필당에서 챙겨주신 풀과 토마토를 한 아름 안고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하님을 양수역으로 데려다주며(인생 최초! 내가 누구를 데려다주다니..) 양평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한다는 빵집에서 박하님과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그는 '행위자'라는 단어를 정말 좋아한다. 단순히 기획력, 진행력을 지닌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능동성과 주체성을 지닌 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를 혼자 간직하지 않고 주변으로 흘러가게 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해내는 생산자이자 창조자 그리고 공동체 운동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원동력이 샘솟는 사랑이라서 때로 지치고 넘어지더라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을 갖고 반드시 일어나는 사람.(맞나요?) 이런 특별한 사람들은 정말 소수일 테지만 적어도 목 놓아 행위자를 부르짖는 박하님은 아주 선명한 행위자일 것이다. 박하님은 행위자는 행위자를 만나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하신다. 그래야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어 계속 행위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매우 동감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행위자라고 칭해주는 진짜배기 곁에 되도록 붙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삶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는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나 같은 욕심쟁이들은 그런 기회를 절대 놓칠리 없고!
<충만함>
박하님을 양수역에 모셔다 드리고 혼자 '고당'이란 한옥 카페에 갔다. 전부터 와보고 싶었는데 주말엔 어떤 양평 카페든 발 디딜 틈이 없기 때문에 평일 오후 시간을 야무지게 노려보았다. 온돌 바닥이 들어오는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따뜻하고 달달한 카페모카 한 잔을 들이켰다. 밤 그림자가 드리운 산속의 소나무 빛깔을 담은 한옥을 보며 앉아 멍을 때리다 글을 쓰다 했다. 방에 가득한 열기처럼 내 마음도 여백 없이 충만했다. 어쩌면 충만함의 반대말은 조급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의 사치를 부려 용기 있게 온 양평 나들이에서 더 없는 충만함을 맛본 나는 아마도 조금은 더 덧없는 것들을 분별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것 같다. 돌아갈 수 없는 강 하나를 건너 새로운 세계의 문 하나를 더 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