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분기

by 밤비

작년 한 해는 연초부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더 나아가고 싶은지 고민하며 불안해하고 조급해했다면, 현재는 아직 연초라 그런지 몰라도 작년보다는 그런 불안은 좀 잦아들었다. 저번 글을 썼을 때보다 고작 몇 개월 지났을 뿐인데,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구조조정

미국은 옛날부터 유연한 고용시장과 살벌한 구조조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요 근래 몇 년간은 유연한 취업보다는 살벌한 구조조정 소식만이 만연했다. 2025년 연말에는 더 많은 기업들이 레이오프 소식을 전했는데, 그냥 레이오프도 아니고 massive layoffs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에서 적게는 수백 명을 잘랐네, 많게는 수천 명, 수만 명을 잘랐네 하는 뉴스가 떴다. 밖은 아직도 피바람이 불고 살벌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의 직장은 레이오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전적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하지 않을 성격을 갖고 있는 회사라서 뉴스에서만 보이는 남 일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레이오프 소식을 전해왔다. 사실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이때일지 몰랐고 막상 닥치니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당장에 경제적으로 문제도 없고, 나 자신도 돈을 벌고 있으니 갑자기 길거리에 나앉을 일이 없는데도 그랬다. 당사자인 남편은 다행스럽게도 덤덤해 보였고 아무리 그래도 내게 기대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깨는 책임감으로 무거워졌다.


좋은 날도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그렇게 남편의 구조조정 소식이 있던 같은 달에 보스로부터 나의 승진 뉴스를 들었다. 원래 연말에는 항상 다음 해의 연봉에 관련된 1:1 미팅을 하는데, 저번에 연봉상승률을 만족스럽게 받았기 때문에 이번엔 별거 없겠지 하고 들어갔다가 보스가 보여준 새 타이틀을 보고는 믿기지 않아서 "이거 정말이야? 이거 진짜야?"를 연발했다. 현직장이 나에겐 첫 풀타임 정규직인데, 3년 반 만에 승진을 하고 시니어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이다. 기존에 하이어 된 시니어들은 평균 경력 10년+인 것을 감안하면 꽤나 빠른 편이고, 이 부분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 적의 연봉과 비교해 보면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총 40퍼센트 정도의 연봉 상승률을 만들었다. 많은 축하를 받았으며, 기존의 시니어들과 동료는 나의 승진 소식이 살짝 썼는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고비

2026년 새해가 밝았고, 학교의 새 학기도 시작되었다. 학교며 회사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남편이 크게 아프게 되었다. 처음으로 앰뷸런스를 부르고 응급실을 갔으며 굉장히 힘든 시간들이었다. 응급실에서 나온 후에는 닥터 서치에 스케줄링, 아픈 남편 돌보기, 회사 일, 학교 숙제, 집안일을 한 달 가까이 저글링 했더니 할 일은 첩첩산중으로 쌓이고 데드라인은 지나고 모든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래도 다행스럽고 감사한 점은 남편이 서서히 회복중라는것과 집 근처에 좋은 스페셜리스트 닥터를 찾았으며 바로 예약이 가능했던 것, 건강보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작년 말에 남편의 구조조정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나의 베네핏 설정을 회사에 제출한 이후였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한번 물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베네핏 부서에 수정요청을 했었더랬다. 서류를 제출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서인지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남편을 내 보험에 등록할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가족 구성원이 갑작스럽게 한번 크게 아프고 나니, 많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알고 보니 큰 병원들과 개인병원들이 밀접해있는 메디컬 헙이라는 것, 그래서 집 앞에 병원만 여러 개가 있고 아무리 큰일이 나도 신속하게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 내 상황을 이해해 주는 좋은 직장상사와 동료들이 있다는 것, 집과 회사가 가까워서 남편이 언제든 날 필요로 한다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내가 잡이 있다는 것 등등... 많은 것들이 감사했다. 특히나 나의 보스는 내가 이 소식을 전하니 필요하면 재택을 하라며, 괜히 밖에 나가지 말고 요리나 먹는 걸로 스트레스받지 말라며 음식 배달 기프트카드를 100불 가까이 보내주셨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아니라며 주고 싶다고 보내주셨다. 보스의 따뜻함에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내가 결혼을 할 당시에도 보스가 축하한다며 카드와 함께 현금으로 100불을 주셨는데, 이런 점들을 돌이켜보니 내가 참 복이 많구나 싶다. 남들은 직속상사와의 갈등을 흔히 겪는다는데(내 남편만 봐도), 나는 인턴쉽이며 정규직이며 모두 좋은 상사들을 만났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말 그대로 미국에 없었겠지.


여하튼, 모든 것에 감사함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재택도 며칠 해 보니까 손만 뻗으면 각종 과일과 캔디, 과자, 음식 등등의 먹을거리가 풍부한 오피스가 그리워지더라. 바리스타를 통해서 무슨 커피든 마실 수 있고, 내가 처리하지 않아도 항상 깨끗해지는 화장실과 런치룸 등등... 다른 것들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일만 해도 되는 환경이 그리웠다. 내가 그렇게 불평불만했던 오피스가 그리워지게 되다니! 이게 윗선들의 전략이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고작 몇 개월이었지만 다사다난했는데, 다 헤쳐 나올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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