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나 바지, 재킷, 양말, 하다못해 속옷까지도 검정 혹은 회색. 아마도 가장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을 꼽으라면 갈색 혹은 남색 정도였을거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본 가수 '김종국'처럼 블랙만 선호하는 블랙 마니아도 딱히 아니었다.
그냥 가장 무난해 보이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옷이 어두운 색이었을 뿐. 특별히 패션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새 옷을 구입할 때, 가장 손쉽게 코디할 수 있는 색상을 선택하다 보니 늘 검정 아니면 회색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언젠가 빨간색 카디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것이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를 놀이센터에 들여보내고 5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겨서 근처 쇼핑몰을 둘레둘레 구경하기로 했던 날이다. 마침 계절도 바뀌는 시점이어서 필요한 옷들이 좀 있었다. 비교적 저렴한 브랜드 가게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때, 빨간색 니트 카디건 하나가 손에 잡혔다. 마네킹에 걸려 있어 예뻐 보였다면 말도 안 한다. 여느 때 같으면 옷걸이를 넘기다 디자인을 보기도 전에 패스했을 색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새 내 손은 그 빨간 니트 카디건을 들어 올려 몸에 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입어 보았고, 나름 밝은 색상이 잘 어울린다 생각되었다.
과연, 내가 이 빨간색 카디건을 입기나 할까? 하는 대목에서 조용히 카디건을 내려놓으려다가 가격표를 보는데, 대박! 이월상품이라 2만 원을 채 하지 않았다.
"사 보지 뭐."
지금도 가격 때문에 그 빨간 카디건을 산 건지, 색상이 나를 사로잡아 사게 된 건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평소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빨간 카디건은 몇 년 뽕빼게 잘 입었다. (지금은 살이 훅 쪄버린 관계로 작아서 입지 못한다 TT)
그다음은 빨간 플랫 슈즈였다.
몇 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언니가 집으로 놀러 왔는데, 연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맨투맨을 입고 온 언니가 그날 참 밝고 화사해 보였다. 거기에 화룡 점점은 바로 빨간 플랫 슈즈~ 에나멜 소재로 된, 얇은 리본 끈이 달린 플랫 슈즈였다.
나는 언니를 보자마자 "어이, 빨간 구두~춤을 추어라~ " 하고 놀렸지만, 실상 그 신발이 참 예뻐 보였다. 그날부터 며칠간 빨간 플랫슈즈 쇼핑을 했다. 봄에 빨간 플랫 슈즈가 하나 있으면 밋밋한 내 의상에 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마흔이 갓 지난 나에게는 빨간색 신발을 사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며칠을 망설이고 있다가 문득. "맞아. 빨간 카디건도 못 입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잘 입었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빨간색 카디건이 빨간색 슈즈도 사 보라고 용기를 준 셈이다.
나는 빨간 신발을 구매했고, 어느 날 그 빨간 플랫 슈즈를 신고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올~~ 빨간 구두~ 춤을 추어라~"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나는 개다리 춤을 한번 춰 주며 반응에 화답했다.
검정과 회색 일색이었던 내 옷장은, 어느새 빨간색과 연두색, 심지어 최근엔 핑크색까지 추가가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흔을 넘기며 머리에 비듬이 좀 생기기 시작한 것도 내 옷장 풍경을 바꾸는데 한몫했다. 젊었을 땐 일도 고민해 보지 못한 일이다. 샴푸를 바꾸어 보고 클리닉 제품도 써 봤지만 메마른 내 머리는 나날이 가려워지고, 나도 모르게 간지러워 긁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 피부도 건조해진다는 속설에 부합하는 현상일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어두운 계열, 특히 내가 주로 입던 검은색 옷을 입는 게 부담스러워졌고, 웃프게도 그런 이유로 마흔을 넘기며 내 옷의 색상들은 밝아지게 된 것이다.
마흔을 지나며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꽃이 좋아졌다는 것.
요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근처 공원으로 걸어가 공원 한 바퀴를 걷거나 뛰는데, 생태 공원이라 곳곳에 생소한 꽃이며 풀들이 많다. 언젠가 해당화 향기가 너무 향기로워 꽃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꿀벌들이 꽃에 내려앉아 왔다 갔다 하는 광경이 참 재밌는 것이었다. 문득 해당화가 참 예쁜 진분홍 색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나는 핸드폰으로 해당화를 촬영했다.
아들 사진도, 다른 풍경 사진도 아닌 꽃 사진이라니! 그 이후에도 나는 간간히 공원엘 나가면 꽃 사진을 찍어댔고, 급기야 아들 사진 일색이던 내 핸드폰 이미지 저장 공간엔 꽃들이 만발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채우고 있었던 것도 99%는 아들의 사진이요, 나머지 1%는 풍경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언젠가부터 꽃 사진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동네 엄마들 모임에서 언제 한번 꽃을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운 적이 있다.
"이 꽃 너무 예쁘지 않아요? 이름 혹시 아세요?"
"와, 진짜 예쁘다"
"오~ 이런 꽃이 있었어? 예쁘다~"
달리기에 취미를 붙인 언니 한 명이, 요즘 들꽃이 너~무 예뻐서 달리기를 하다가~ 꽃 사진을 찍다가~ 아주 정신이 없다며 그동안 찍은 들꽃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요즘엔 어플 성능이 좋아서, 꽃 사진을 찍으면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알려준다고. 생각해보니 그 언니 역시 나 못지않은 블랙 우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이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초록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어느새 프로필 사진도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고.
우리는 나이가 들면 왜 꽃이 좋아질까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하나같이, 어릴 적엔 할머니들이 왜 꽃무늬 옷을 좋아하는지,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좀 알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대부분이, 어릴 적엔 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흔 즈음하여 꽃이 좋아지고, 꽃무늬가 좋아지고 색깔 옷이 좋아졌다고 얘길 하였다.
초록창에 '나이가 들면 왜 꽃이 좋아질까?'를 검색해 보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흔이 넘어가면 나이가 드는 것이다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헛.) 비슷한 질문들이 많이 보였는데, 한 지식인 답변란에 답한 심리 상담사의 말을 옮겨 보자면.
-개인적인 생각으론 평안함을 찾고 보여주기 위해서인 듯하다. 카톡이란 공간은 나를 상대방에게 단순히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이미지만으로 나를 표현해야 한다.(중략) 또 나이를 먹다 보면 나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인 것이 평화로운 풍경과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다.
-정확히 파악된 바는 없지만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얼굴에 보이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닌 나이 든 모습을 보면 스스로 보기 싫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화사한 옷이라도 입으면 더 낫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꽃무늬 옷을 입게 되고, 꽃을 찾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글쎄. 나이가 드니 나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게 싫긴 하더라. 행복감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라. 음... 못 사는 걸 광고하고 싶은 생각이 없긴 하지. 어쨌거나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시작된 꽃에 대한 관심은 카톡 프로필 사진을 꽃으로 채우는 그 많은 '엄마'의 대열에 나를 합류시켰다.
나의 현재 프로필 사진. 000 가든에서 본 보라색 꽃들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돌아가서, 꽃이 좋아졌다는 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물론 처음부터 꽃을 좋아했던 사람은 예외로 두고. 나처럼 무채색 계열을 좋아하던 사람이 빨간색을 찾게 되고 꽃이 좋아진다는 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위에서 나열한 지식인의 대답만으론 만족스럽지 못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더 찾고 있을 즈음이었다. 유 퀴즈에 sg워너비 김진호가 나왔는데, 그의 노랫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정말 작사 천재임이 분명하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김진호
여행을 가는 게 옷 한 벌 사는 게
어색해진 사람
바삐 지내는 게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해진 사람
한 번이라도 마음 편히 떠나보는 게
어려운 일이 돼버린 사람
동네 담벼락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아직도 걸음 멈추는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티브이를 켜고 잠이 들어버리는 일이
어느새 익숙해진 한 사람
티브이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얘기에
혼자서 울고 웃는 한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초록빛 머금은 새싹이었지
붉은빛 머금은 꽃송이였지
나를 찾던 벌과 사랑을 했지
그 추억 그리워 꽃밭에 있지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벌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나도 20대 청춘시절엔 초록빛 머금은 새싹이었다. 붉은빛 머금은 꽃송이였다. 이놈의 벌을 잘못 만나서 요렇게 못난이가 되어 마흔을 지나고 있지만,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 예뻤던 내 모습을 추억하고 싶어서 꽃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오늘도 프로필 사진을 무엇으로 바꿀까...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이미지 속 수많은 꽃들 중 어느 것을 고를까 하고, 꽃밭에서 놀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