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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pr 27. 2024

쾌락의 장벽 vs 창작의 고통

그렇게 지내다 퇴직을 하니 하루하루가 좋았습니다. 늦잠을 자도 되고, 대낮에 백화점에 가서 느긋하게 쇼핑하고 밥을 먹을 수도 있었어요. 직장인들에겐 로망인 일이었죠. 또 며칠간 똑같은 옷을 입어도 되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땐 직원들과 매일 얼굴을 보니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기 어렵잖아요? 퇴직 후엔 매일 다른 사람은 만나니 일주일 내내 같은 옷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벼르고 별렀던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를 한 달간 다녔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두 번이나 항공편과 호텔을 예약했다가 못 간 적이 있었어요. 급한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했던 터라 그 여행이 더 좋더군요.


시간이 자유로워지니 여행을 떠나는 시기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는 제가 원했던 늦가을에 딱 맞춰, 프란체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도 늦가을을 기다렸다 다녀왔습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중국 만리장성도 덥지 않은 계절에 여유롭게 걸어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즐겁지 않더군요. 제 마음속에선 다른 것이 조금씩 올라왔습니다. '나는 즐겁지 않다. 나는 만족스럽지 않다······.' 의아했습니다. 우울증인가 싶었어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아 어느 날 갑자기 퇴직한 것도 아니고, 제 플랜에 따라 제가 원하는 시기에 제 발로 나와서 제가 원하는 삶을 시작했는데 우울하다니요. 퇴직하고 1년이 지났을 무렵 알아차렸습니다. 일이 너무 많고 바쁜 삶을 살다 일하지 않는 삶을 선택해 갈아탔는데 어쩐지 저는 그 삶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어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36




제가 대리였던 때니까 한참 전의 일입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먹고 제 방에 앉아 음악을 들었습니다.  가을날 저녁, 음악에 빠졌죠. 슈베르트의 곡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겁니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건 분명해. 그런데 내가 음악을 듣고 즐기려면 음악을 만드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거네. 또 음악을 들으면 충만해져서 좋지만 거기엔 내가 뭔가를 해내는 건 없잖아. 그냥 듣는 거니까 말이야. 이건 너무 수동적인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이 음악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할 필요도 없고요. 한데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나는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하는, 내 생각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그래야 만족이 되는 인간'이란 걸요. 만약 제가 음악을 들으며 능동적으로 뭔가를 했다면 음악이 제 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제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앞으로 쭉 '생산자'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제 팔자를 예감한, 혹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린 중요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38




제목에 끌려서 대출한 이 책. 삼성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으며 현재는 최인아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니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이거구나!' 싶은 혜안을 준다.


나도 언젠가부터 여행이 재미가 없어졌다. 물론 볼 것, 배울 것이 많은 해외여행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행이 싫다기보다 시시해졌다. 숙소와 맛집을 검색해서 정하고, 그 지방 명소를 대충 둘러보고 1박 2일이나 2박 3일의 일정을 빠듯하게 소화한 후 귀가하는 패턴이 싫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듯했는데, 스스로도 딱 꼬집어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었는데, 할렐루야! 답을 알았다.  나 역시 최인아 작가와 같이 생산자 성향이었던 거다. 


만약 육체의 한계를 체험하는 혼자만의 도보 여행이거나 사진에 빠져서 피사체가 극도로 아름답거나 기이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매는 여행이었다면 시시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뭔가를 고민하고 만드는 생산자로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멍을 때리거나 유유자적하는 것은 뭔가에 열중하거나 성취를 이뤄낸 후에 휴식으로서 얼마간 의미가 있지, 돈과 시간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주변인(구경꾼)으로 오랫동안 머무는 걸 내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행이라는 쾌락에는 어떤 장벽이 있나? 우선 돈이 든다. 더럽거나 불친절한 숙소와 식당에서 여행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숙소와 맛집을 잘 알아봐야 한다. 네X버에 거짓 정보가 많아서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이동의 피곤함이 있다. 자차는 자차대로 운전의 피곤함을 감수해야 하고, 대중교통은 프라이버시 침해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추울 정도로 빵빵하게 트는 에어컨, 심하게 젖힌 앞자리 의자, 자기 방인 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떠드는 통화 같은 것들 말이다. 동반자가 있는 경우 동반자의 취향도 존중해야 하므로 내가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할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아내가 체력이 약하고 다리가 부실하므로 여행 코스에서 산은 거의 패스다. 주말에 명소에 가는 경우는 인파에 시달릴 각오도 해야 한다. 나의 귀한 시간과 돈을 써서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지만 이런 걸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니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신은 세상 모든 만물에 음과 양을 동시에 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쾌락의 장벽이라 부른다.


맛있는 육식은 소화불량이라는 장벽과 함께 한다. 술은 숙취와 함께 한다.  즐기러 영화관에 가지만, 2~3시간의 긴 러닝타임 동안 우리의 눈과 귀는 대형 화면과 고급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한 영상과 웅장한 사운드에 시달린다. 돌비 서라운드 사운드를 3시간 동안 듣고 있으면 감동보다는 피로해진다. 게다가 앞자리에서 계속 팝콘을 우걱거리고, 콜라를 홀짝거린다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겠지만, 영화가 기대와 달리 재미가 없으면 그 피로감은 한층 더 심해진다. 


모든 쾌락에는 장벽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장벽을 넘어서 쾌락을 추구할 것이냐, 장벽을 넘을 만큼 가치 있는 쾌락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쾌락을 포기할 것이냐다. 위장이 약하고 숙취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고기와 술이라는 쾌락을 깔끔히 포기하는 편이 낫다. 쾌락보다 장벽이 더 크기 때문이다. 여행 준비의 수고로움이나 이동의 피곤함이 싫은 사람은 여행을 포기하고 집에서 조용히 책을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이런 선택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나같이 50살이 넘은 중년은 물론이거니와 젊은 사람도 결국은 짧디짧은 인생이란 시간이 너무 유한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현실을 벗어나면 무조건 즐겁겠지'하는 여행에 대한 젊은 날의 소견은 이제 달라졌다. 시간도 돈과 같이 가성비를 따져보고 잘 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산자 성향이고, 시시한 관광 같은 여행은 싫어서 여행을 안 가고, 그 시간에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면 무조건 행복할까? 그것도 아니다. 창작 행위는 그 옛날 서태지의 은퇴의 변처럼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글이든, 음악이든, 영상이든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로움과 배움과 고통을 수반한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완성한다 해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관심 없음'이 기본값이다. 


극단적인 렌즈를 끼고 본다면 삶에는 이 두 가지 옵션밖에 없다. 장벽을 넘어 쾌락을 추구하든지, 고통을 수반하는 창작을 하든지. 그래서 나는 장벽을 넘을 정도의 고퀄리티의 쾌락이 아니라면 쾌락을 포기하고 대신 고통을 수반하는 창작을 계속하기로 했다. 창조에는 고통과 함께 순도 높은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쾌락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조성진이나 임윤찬의 피아노 치는 쾌락을 어찌 내가 알거나 동일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무슨 도인처럼 고통스런 창조 활동만 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하기 싫은 일로 10만 원을 벌어서 10만 원짜리 식사를 거하게 하느니 찬물에 밥을 말아 먹더라도 그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글에 투자하겠다, 결과가 오랫동안 안 나와도 마음의 중심을 그렇게 잡고 가겠다는 말이다. 




... 중요한 것은 그 업의 핵심을 꿰뚫는 관점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관점이 확실하고 올바르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파악할 수 있고, 의사결정의 선후를 정할 수 있으며 지금 몰두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보면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먼저 하거나 먼저 해야 할 것을 후로 미루어서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미처 간파하지 못해 덜 중요한 걸 붙들고 있을 때도 적지 않고요. 이는 일의 본질을 헷갈려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시대에 맞게 업의 본질을 파악하고 적확한 시선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한 얘기를 우리 개인들에게도 적용해 보죠. 여러분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알고 계신가요? 혹은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해 자주 생각하시나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54




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나? 여러분과 나는 그 본질을 자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유한한 시간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오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인상적인 성취를 한 사람이 하는 '그냥 했다'라는 말 속에도 하기 싫은 유혹, 아팠던 몸, 악평에 주저앉을 뻔한 경험, 된다는 보장이 없어 그만두고 싶었던 외로움 등이 한가득입니다.


그걸 다 건너 비로소 어느 지점에 다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그저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 없이 지낸다는 것뿐 아니라, 하고 싶지 않게 하는 현실과 마음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정지우 작가의 북토크가 있던 날 또 하나를 새로 알았는데, '그냥 했다'는 것은 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글을 예로 들어보죠. 글을 쓴다고 해서 당장 직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출간 제의가 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 외의 대안은 없다는 게 오히려 길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 작가도 그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글쓰기가 당장 환한 길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진로와 생계 등의 무거운 숙제를 앞에 두고 그냥 썼던 겁니다. 한데 놀랍게도,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쌓이자 날마다 쓴 글들은 책이 되었고 그를 작가로 만들었습니다. 아, 정말이지 이건 그렇게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 뭔가를 그냥 한다는 거야말로 정말로 하면 결국 어느 날엔 열매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걸 보여드릴 방법이 없네요. 직접 해보시라 말씀드릴 수밖에.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189




내가 장벽이 있는 쾌락을 포기하고, 고통스런 창조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건 최인아 작가의 글에 적힌 의미와 같다.


밖에서 보는 시선 - 성과 없는, 돈 안되는 일에 매달려 있다. 집착한다.


내 안의 목소리 - 내 인생을 통틀어 처음 꾸준히 하려고 마음먹고, 꾸준히 하고 있는 일이다.


계절의 급격한 변화, 불과 며칠 사이에 확 바뀐 산책로의 풀들과 멀리 산들의 녹음을 보면 인간의 삶의 성과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한다. 풀들이 겨우내 뿌리를 내리고 생존해 있지 않았다면 봄날 이토록 푸르름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급격한 계절의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겨울은 지루하지만 봄은 갑자기 찾아오고 황량한 들판은 하루아침에 녹음이 된다. 삶의 성과도 어느 날 급격하게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재미도 제겐 아날로그의 영역입니다. 일의 희로애락을 겪어봐야 재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요. 내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입니다. 재미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자에겐 자신을 열어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즐거운 사람은 내가 장벽으로 받아들인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설 것이다. 악기와 함께 연습이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악기가 주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진정한 재미는 쉽게 자신을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일의 핵심에 닿아보는 겁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일의 핵심까지 내려가면, 그래서 겉에선 알 수 없는 일의 본질과 비로소 만나면 그 일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이 생깁니다. 그걸로 그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해나가는 거지요. 그러면 재미가 붙기 시작합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많은 이들이 이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성취하고 재미에 닿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222


돌아보니 인생은 늘 자신을 다 열어서 보여주는 것 같지 않고 절실한 마음으로 끝까지 달려드는 자에게만 안쪽을 허락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234


뜨거울 열. 우리는 열정이란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인파이터 infighter의 폭발적 에너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현실은 마라톤에 가깝고 일터에서의 성취는 시간과의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될 듯 될 듯 되지 않고, 열심히 했지만 평가받지 못해 기죽고 절망하는 시간의 연속이죠. 그러다 가늘게 성취와 성장 같은 열매를 맺고요. 많은 경우 어떤 일을 시작하는 계기는 '좋아하는 마음'이 틀림없지만, 시작과 성취 사이의 길은 결코 평탄한 신작로가 아닌 겁니다.


지속하는 마음을 들여다보기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연애와 결혼으로 풀어낸 소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도 생각나는군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이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이때도 시작은 좋아하는 마음이죠.


하지만 부부로 한평생 사는 일이 녹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좋아하는 마음으로 맺은 인연이 숱한 고비에도 흩어지지 않고 소중한 가족으로 오래 남아 있게 하는 힘에 대해 세상 모든 부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에 대한 의리, 애틋함, 책임감, 때론 미운 정까지. 일상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240


그럼 왜 애초에 성취 그래프는 45도 우상향이 아니라 계단식인 걸까? 저는 이 질문도 제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런 답이 떠오르더군요. '단단한 소수를 걸러내는 우주의 테스트'라고요. "정말 그거 하고 싶어?" "어렵고 힘들어도 꼭 그 일을 할 거야?" 이런 질문에 끝내 "네!"라고 답할 사람,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276


그 후론 힘들 때 이렇데 되뇌곤 합니다. '좀더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귀한 것들이 있다. 그런 시간을 보낸 후의 나는 지금보다 한결 나아져 있을 거다'라고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305


사실 생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므로 여전히 유불리에 매몰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생의 짧지 않은 시간을 우리는그렇게 살지 않았나요? 이젠 자신의 안에서 올라오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그 후의 인생을 사는데 후회가 적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돈과 기회와 그 밖의 여러 가지를 순간순간 계산합니다. 어느 것이 더 유리한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리죠. 그런데 다행히도 결정적 순간에서만큼은 유불리가 아닌 제 마음의 소리를 따랐더군요. 그러기를 정말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유불리를 넘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시간, 그것도 혼자 있는 시간입니다. 혼자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내어 문제에 몰두하는 겁니다. 생각했다 지우고 또 생각했다 또 지우면서……. 그런 끝에 드디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단단한 생각을 만납니다. 그 생각에 의지해 앞으로의 시간을 또 살아나가는 거죠.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p.321




세상의 쾌락에 압도당하거나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유명한 여수보다 이름 없는 장수가 나는 훨씬 좋았다. 무리 지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관광객이 없어서 좋았고, 나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하고 넓은 장소라 좋았고, 허울좋고 값비싼 엉터리 맛집이 아닌 싸고 맛난 밥집과,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이 좋았다. 나의 글과 음악이 비록 장수 같을지라도, 내 창작 활동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갈수록 견고해진다면 오랜 세월이 걸릴지라도 언젠가 열매를 맺으리라 믿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도 좋다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인정받고 싶다. 


쾌락이든, 창작이든 삶은 대가를 요구한다. 어떤 것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지는 우리의 선택 사항이다. 한 달 열심히 알바를 해서 100~200만 원짜리 하룻밤 호캉스를 하는 게 자신에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의 경우는 당장 적게 벌더라도 음악과 글을 만드는 창작 활동에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객관적으로 내 글과 음악은 매우 무딘 칼이다. 팔리지 않는 콘텐츠다. 그러니 칼끝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한 번에 날카로워질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조금씩 날카로워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손끝만 닿아도 베일만큼 날카로워지는 임계점을 만날 것이다. 




여러분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쾌락이 과연 장벽을 넘을 만큼 가치가 있는 쾌락인지, 여러분이 추구하는 창작(일)이 - 삶 자체도 하나의 창작이다 -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 창작(일)인지···. 점검 결과 장벽을 넘을 만큼 가치 있는 쾌락이 아니라면 포기하고,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본질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그 중심에 가닿기 위해서 조금 더 힘을 내보자. 우주의 테스트를 통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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