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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Feb 11. 2024

반복 = 지겨움이 아니라는 깨달음

강변 산책길에 흔한 오리들을 늘 구경한다. 여러 재밌는 모습들을 봤지만, 잠수를 할 때는 왜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했다. 어제는 마침 기온도 따뜻하고 햇살이 밝아서 그런지 강물 속이 투명해서 제법 멀리까지 물속을 볼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오리떼가 잠수를 하길래 재빨리 움직임을 따라가 봤지만 어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 눈이 나쁜 걸까? 산책 코스 유턴 구간 즈음 새끼 오리 두 마리가 다시 잠수를 한다. 놓칠 세라 다시 유심히 물속 그들의 형체를 좇는다. 드디어 그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물속에서 물고기보다 더 빠르게 순간이동을 한다. 물 밖에서 뒤뚱뒤뚱 걷고, 새보다 빨리 날지 못해 우습게 봤던 그 오리가 아니었다. 저런 숨겨진 능력이 있었다니!


일상 속의 반복이 뻔하고, 그래서 지겹다는 생각에 어떤 일을 하기 싫을 때가 많다. 산책도 그렇다. 같은 코스를 걷는 산책은 관념 속에서는 당연히 뻔한 일상이다. '단지 다리 운동만을 위해서 억지로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날씨가 많이 풀린 겨울 낮 산책은 햇살이 포근해서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꽁꽁 얼어붙은 날씨의 저녁 산책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상류에 댐을 만들어 완전히 천연적인 강이 아닌데도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잘 살아가고 있는 오리들을 보면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여러 신기한 모습에 감탄을 연발한다. 오늘 나는 산책 중에 마라톤 준비 중인 건지 연휴 기간인데도 열심히 뛰고 있는 남녀를 보았고, 잠수하는 오리의 물속 액션을 보았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오늘 나의 산책은 반복되는 지겨운 산책이 아니고, 새로운 산책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 나에게 안부 전화를 자주 하셨다. 통화의 주 용건은 '왜 안부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느냐'였다. 그러면 나는 으레 "네, 전화드릴게요" 하고 끊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렇게 살가운 정이 없는데, 별 할 말도 없이 자주 전화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리지 않았더랬다. 그런 아버지가 치매가 걸리고 나서는 전화의 빈도가 줄더니 어느 날부터 거의 전화가 없었다. 치매가 진행될수록 의사소통이 거의 안됐다. 요양원에 인사를 가도 "왔나? 바쁜데 뭐 하러 왔노?" 하고는 말없이 1분쯤 앉아 계시다가 "올라갈란다" 하면서 면회실을 나서는 게 끝이었다. 


나의 자식들이 장성하여 독립을 하고 나니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전화 한 통이 뭐라고 서먹하든 어쨌든 그때, 아버지가 원할 때, 그나마 의사소통이 될 때 전화를 자주 드릴 걸' 후회가 된다.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몰랐기에 아버지의 잦은 전화는 내게 단순한 반복이었고, 일정 부분 지겨움이었던 것이다. 그 전화 속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었지만, 마음의 눈이 닫혀 있는 내게 그 전화는 그냥 유난스러운 아버지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젊은 날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잠이 많고 사회 경험이 없어 생활력이 약했던 아내는 빨리 성공하고 싶은 나에게 짐 같기도 하고, 그 게으른 모습(내 기준에)을 매일 봐야 하는 게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칙칙한 반복(현실)의 이 가정을 벗어나면 뭔가 새로운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막연한 환상도 있었던 것 같다. 가정을 아끼고 지키려는 아내의 진심을 몰랐기에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아내를 뻔한 사람으로 대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귀한 마음이 있었고 아내에게는 가정을 잘 꾸리려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의 눈과 귀가 닫혀 있는 내게 그들은 그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완벽한 부모는 없을 터, 여러 과오가 있는 아버지더라도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 드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내는 망나니 같은 나의 마음을 가정에 안착시켰으며, 자신이 번 돈으로 큰아들을 공부시켜 안정된 직장에 합격하게 지원했고, 빚 많은 막내가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도록 많은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동안 나는 이것저것 장사니 시험준비니 일만 벌리고 돈만 까먹었다. 결혼생활은 마음이 닫혀있던 나에게만 재미없는 반복이었던 것이다.


음악도 그렇다. 처음에는 쉬운 소품으로 시작한 피아노 연주에서, 코드 반주로 넘어가고, 코드 반주를 하다 보니 스케일을 연습하게 되고, 그다음엔 각종 장르에 따른 리듬, 텐션, 리하모니제이션, 스트링 편곡, 대위법...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것,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결코 지겨운 반복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지겨울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날마다 다른 음을 연주하고, 똑같은 코드 진행에서도 매번 다른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 똑같은 멜로디도 가사가 바뀌면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부르게 된다. 가수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나는 반복이 지겨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날마다의 산책에서 오리의 진귀한 모습들을 새롭게 발견하듯 새로운 음악 세계에 대한 발견이자 확장이지 무료한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결국 우리 삶이 그렇다. 무료한 반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표면만 보는 사람은 무의미한 시간들을 흘려보낼 것이고, 그 이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 반복을 감내하고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자들에게만 진귀한 보물들이 보일 것이다. 내가 오리의 물속 놀라운 수영 솜씨를 봤듯이 말이다. 


나는 작년 10월에 홍보 영상에 깔릴 CM송을 하나 완성하였고, 최근에는 지방의 작은 기획사에서 쓸 행사용 음악 편곡 작업을 완성하였다. 의뢰를 받아서 작업을 해보니 일로서도 음악이 그렇게 질리거나 싫지 않다는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또한 작업으로서의 음악 활동 반복이다. 이 반복을 통해 나는 많은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늦은 나이에 깨달은 <반복은 지겨움이 아니다>라는 진실. <반복 속에 귀한 가치와 열매들이 숨어 있다>는 진리. 이런 가치들을 실천해서 내 삶의 과실들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싶다. 허무주의와 회의론자였던 10대 시절의 나. 이제 50대인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투덜대며 살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츤드레가 쉽게 그 속을 내보이지 않듯이 삶의 선물들도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정 보고 또 보고자 할 때, 진정 가까이 다가가서 마음을 열 때, 삶의 보석들이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스러운 그 오리새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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