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의 대화 주제가 나의 잦은 이직으로 옮겨갔다. 나를 제외하곤 다들 수십 년간 한 직장에 근무한 친구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가 1순위이고, 그것을 성실하게 행하는 어른을 철이 들었다고 한다.
철이 덜 든, 벌써 50이 된 나는 친구들에게 성토를 당하면서 수긍도 하고, 변명도 해보지만 어쩐지 그 변명이 공염불 같아, 친구들의 마음까지 가닿게 할 수 없는 무기력을 느낀다.
삶의 의미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자고 잘 즐기는 거라면 그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인 삶의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자살해 버리면 그만이다. 문제가 간단해진다. 먹고 자고 즐기는 것은 이미 수없이 경험해 봐서 지겨운 면이 있다. 쾌락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따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즐거움, 영원한 즐거움도 이생에는 없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우리를 급습하고,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거인과 매일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이 삶의 의미 중 절반 이상이라면...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 호의호식하는 것이 좋지만 한편 그것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희생할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혈혈단신이라면 거지같이 살면서 친구들한테 비난을 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나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삶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의 돈벌이는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노년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위해 중년의 삶을 매진해 버리면 중년 그 자체의 삶은 무엇인가? 무엇이 남는가? 삶이란 태어나서부터 계속 미래를 준비하다가 마지막 가까이 가서는 죽음 직전의 미래를 준비하고 결국 죽음이라는 절벽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인가? 이것은 살기 위해 산다는 매너리즘이다.
나와 내 가족들이 굶어죽거나 집 없는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모으는 것. 이것이 현실 인생의 전부? 삶의 의미를 수없이 많은 책과 강연에서 부르짖고 있지만 주변의 현실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산다. 죽도록 고민해 봐도 알 수 없는 것이 삶의 의미일 테니 쓸데없는 생각을 고만하고 현실적 실리를 찾는 것이 현명한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매일 아침 피아노 앞에 앉을 때마다 갈등을 한다. 「The One」이란 책에 있는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일을 하루 중 최적의 시간에 꾸준히 하라'는 저자의 주장을 200일 넘게 지키고 있지만 피아노를 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점심 때의 수입, 불성실한 가장이라는 죄책감이 늘 따라다닌다.
피아노를 치는 행위는 원시적인 의식주 해결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무가치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손흥민의 축구도 마찬가지다. 차이는 있다. 손흥민의 축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기쁨을 주지만, 나의 피아노 연주는 지금으로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감이 없는 행위다.
아주 느리고 약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게만 주기는 한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서른 즈음에>로 그런대로 버스킹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연말은 돼야 할 것 같다. 연말이면 대략 5개월간 연습한 꼴이 된다.
피아노를 연습하는 70분이 하루 중 음악에 투자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날마다 내 자존감을 약간 지켜준다. 이 시간이 없다면 나는 그냥 동년배보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중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친구들은 음악은 너보다 재능이 많은 네 형이 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말은 어릴 때부터의 열등감을 또 떠올리게 한다. 공부든, 음악이든 늘 형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나.
예술이 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아무 감동도 느낄 수 없었던 공연도 많았다. 어제도 그랬다. 외국의 유명한 보컬그룹이라서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갔건만 잘 차려입고 유려한 하모니를 내는 그들에게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내 마음 상태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엊그제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형과 동생의 눈물이 오히려 더 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진실했으니까.
너무나 많은 글들과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라 나오자마자 묻히는 작품들이 허다하다. 무명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면서 내 목소리를 내야 할까? 어쩌면 어느 정도 관종이 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삶을 포기하고 평범하고 열심히 돈이나 버는 삶이 더 현명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작품을 통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번식을 위해서나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태어났다고는 믿지 않는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온전히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그건 아닌 것 같다.
자연의 이치를 봐도 '공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만을 위해서 - 자식만을 위해서 한평생 희생한 한국의 옛 어머니상처럼 - 사는 것도 바람직한 삶은 아닌 것 같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듯 나의 존재도 인정해야 삶이 온전해지지 않을까.
결국 삶은 기억이다. 남는 것은 기억이다. 더 좁혀 말하면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이다. 내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줬던 순간들. 그 사랑의 종류와 깊이가 달라도 - 나는 가족에게도, 사회에서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 그 모든 사랑이 소중하다.
받은 사랑은 보은의 마음이 되어 다시 그 당사자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짐승도 느끼는 보은의 감정은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이다. 갚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과 절망을 참을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어렵다. 아무도 정확한 답을 모른다. 그러나 소거법으로 아닌 것들을 지워나간다면 조금 더 진실에 가깝게 살다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소거법에서 타인과 사랑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