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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Sep 02. 2023

우리가 좇는 것은 가치인가, 쾌락인가, 습관인가


우리가 인류를 위한 어떤 선한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면 그날부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음악을 하는 내가 인류를 위해 좋은 곡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면 그날 이후로 어떤 시련이 와도 나는 좋은 곡을 쓰기 위해 음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위대하거나 똑똑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수없이 흔들리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여기에 몰두하다가 저기에 주의를 빼앗기고, 감정이 흔들리고, 불안에 휩싸이고, 생각이 산으로 간다.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나는 내가 좋은 곡을 쓰기 위해서,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만 피아노를 연습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피아노를 치는 순간순간 쾌감이 있는데,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쾌감이 있다.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주고 치다가 어느 순간 힘을 빼고 치면 더 잘 쳐진다는 걸 깨닫고 힘을 뺀 손가락 끝으로 건반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날 때의 쾌감, 16분 음표나 엇박을 치는 순간이 박자에 딱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 왼손과 오른손의 화음(음을 동시에 누를 때)의 타이밍이 섬세하게 정확할 때 느끼는 쾌감, 구슬이 굴러가듯 또렷하고 상큼한 고음의 쾌감, 둔중하지만 깊이가 있는 저음의 쾌감, 잘 안되는 부분을 반복할 때 무한루프를 도는 듯한 -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단지 그 반복의 우주에만 있는 듯한 - 쾌감, 어떤 부분을 연습할 때 그 곡의 느낌에서 벗어나 그 부분 자체가 독립적인 음악이 될 때 - 마치 뻔한 요리를 하다가 새로운 요리의 착상이 떠오르는 느낌 -의... 발견의 쾌감, 조용한 공기를 나의 타건으로 진동시킨다는 지배의 쾌감... 이렇듯 인지하려 하면 많은 쾌감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피아노 앞에 앉을 때 이런 쾌감을 의식하고 앉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습관으로 앉는다. 나의 하루 루틴의 시작이 피아노 연습이므로 피아노를 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면 뭔가 불안하고, 음악가로서 불성실한 시작 같고, 자존감도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이제 180일 가까이 되는 누적연습일이 아깝기도 하고. 이 정도 느낌으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물론 좋은 곡을 써야겠다는 거시적 목적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맞다.


가치만을 위해 살 수 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삶은 피곤해질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가치지향적 동물이 아니다. 이 가치에게는 쾌락과 습관이 필요하다. 가치, 쾌락, 습관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고 상호내포적이다. 즉 가치가 쾌락과 습관을 포함하고, 쾌락이 가치와 습관을 동반하며, 습관이 가치와 쾌락을 필요로 한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은 비만 등 질병을 염두에 두지 않고, 먹어대는 삶과 비슷하다. 습관은 매우 중요하지만 습관대로만 살면 또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버려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될 수 있다.


독서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달리는 자세만을 견지한다면 독서는 피곤한 노동일뿐이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다 읽을 수 없는 책. 그것을 위해 설정한 끝없는 목표점을 향한 고단한 투쟁이다. 하지만 또 습관적으로만 독서를 하면 내가 글자를 읽는지 글자가 나를 읽는지 알 수 없이 모호한 텍스트만 내 의식의 겉면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독서의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을 추구한다면 거시적인 구조, 틀을 잃을 수 있다. 벽돌쌓기가 재미있어서 벽돌만 주야장천 쌓는다면 과연 집이 완성될 수 있을까?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연주자는 자신의 연주에 몰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연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연주에만 심취해서 플레이한다면 밴드의 전체 사운드, 청중이 느끼고 있는 공기의 온도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쾌락을 느끼며 습관을 이행하되 가치를 자주 상기하는 것이 좋은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쾌락도 매우 중요하다. 내가 피아노를 치며 쾌락을 느끼는 순간을 분해하고 분석한다면 뇌, 손가락의 어느 세포가 될 것이다. 결국 거대한 가치는 하나의 점과 연결된다.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행위 자체를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만 폄하해서 대우하지 말라는 얘기다. 만약 내가 달리기가 좋다면 그것이 어떤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혀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내 삶의 원초적 생산, 결실이다. 마라톤에서 꼴찌를 하더라도 달리기가 좋다면 그것은 내 삶에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다. 아니 생산 그 자체, 열매다. 이미 기쁨을 생산해 냈기 때문이다. 돈 안되는 쓸데없는 짓이 아니고, 삶을 낭비하는 행위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이 안되면, 남들에 비해 못 하면 자책을 한다. (남들에 비해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기준이 딱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돈 안되고 잘 하지도 못하는 짓을 왜 하나? 뻘짓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지만, 이것에 대한 집착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인정을 받지 못해 슬퍼지면 본래의 쾌락을 잊어버리고 그러면 쾌락을 잃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쾌락은 인정받지 못했을 때도 그 행위를 지속,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구독자가 늘지 않아도, 출판한 책이 망해도 글을 쓸 때의 다양한 쾌감을 경험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또 글을 쓰게 될 것이다. 하다못해 식당 리뷰를 장황하게 쓸 수도 있고, 아들딸에게 카톡 메시지를 장황하게 남길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발산을 하게 된다.


우리가 가치를 지향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며 꾸준히 갈 수 있는 성실하고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다. 가치는 쾌락과 습관과 함께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고 쾌락이나 습관이 꼭 가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삶의 한 요소이다.




우리가 가치와 쾌락과 습관의 사슬 속에서 엮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명확히 인지한다면 세상의 혼돈스러운 메시지에 휘둘리지 않고, 남들이 쉽게 뱉는 말들에 상처받지 않으면서 담담히 나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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