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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l 18. 2024

영화 올드보이 - 죄와 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3~11)


극 중 이우진은 오대수를 심판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오대수를 심판한다. 그러나 이우진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죄 없는 자'가 아니었다. 누이를 범한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지었다. 이우진 누나의 자살 원인은 오대수의 혀였을까? 오대수가 혀를 놀리게끔 원인 제공을 한 자는 이우진 아닌가. 이우진은 오대수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15년 이상을 공들여 복수(심판) 한 후에 그 역시 자살이라는 파멸로 종말을 맞이한다.


오대수는 극의 마지막에 최면술사를 불러서 기억을 지우려 한다. 오대수가 딸과 근친상간을 한 것은 모르고 한 행위다. 모르고 한 행위는 죄가 되지 않나? 여기서 또 물음표가 생긴다.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수많은 죄인들을 보라. 조현병이면, 술에 취한 상태면 죄가 줄어드나? 사람을 죽였어도?


오대수가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면 죄가 사라진 걸까? 망각이 곧 죄사함일까? 그렇진 않다. 이불을 뒤집어쓴다고 상황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망각이라는 자연의 혜택(?) 때문에 과거의 많은 죄들에 대한 가책에 시달리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지만 세월의 힘으로 내가 잊고 지낸다고 해서 죄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다만 예수께서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듯이 신과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지, 내 인식에서 사라졌다고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대수에 대한 이우진의 심판은 불특정 다수의 댓글테러와 마녀사냥으로 결국 자살한 많은 연예인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 <지옥>의 심판관을 자처하는 그 사이버렉카 세력처럼 여전히 인터넷 세상인 현대에는 이런 악한 세치 혀들이 판을 친다.


이우진은 오대수와 달리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오대수를 심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또 독재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독재장기집권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박정희 정권은 10.26 사건을 불러왔고, 이 사건은 다시 전두환 독재정권의 마중물이 되어 5·18의 비극을 불러왔다.


세계사에 잘못된 재판과 심판이 얼마나 많은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던, 어쩌면 정당하게 여겼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처럼...


영화 <올드보이>는 죄와 심판을 고민하게 한다. 죄란 무엇인가? 심판이란 무엇인가? 내가 죄인이라서 그렇고, 세상에 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세월호 사건>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젊은 날 수많은 여성편력과 그로 인한 가정 파탄을 핑계로 연로한 아버지를 늘 차갑게 대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과연 그것이 잘한 일인가 싶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신 후에까지 부자지간의 감정적인 교류 없이, 그 흔한 여행 한번 없이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말았다.


20대, 성인이 되어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께는 자식을 버렸다는 이유로 아주 무례하게 굴었다. 어머니 마음에 많은 상처를 줬다.


내가 아버지를, 어머니를 심판할 자격이 있나. 원망은 할 수 있을지언정 심판할 자격은 없다. 그걸 젊은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다. 나 역시 내 자식에게 부족하고 못난 부모인 것을... 누구를 감히 심판한단 말인가.


잘못된 심판과 정죄는 쌍방을 파멸로 이끈다. 우리는 때로 운명에게, 자기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어리석은 감정에 휩싸이고 휘말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나. 노하여 복수하는 것의 끝은 결국 파멸밖에 없다.


오대수가 그러했듯 세 치 혀로 누군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우진이 그러했듯 복수심으로, 원망으로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함부로 심판해서도 안된다. 파멸보다는 소멸을 택해야 한다. 소멸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순리다. 분노가 소멸하게끔 기다려줘야 한다. 나는 수년 전 내 손가락을 부러뜨린 거구인간과 수술을 엉터리로 한 의사에 대한 분노가 4년 넘게 지속됐다. 왜냐하면 내 손가락은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손가락 신경세포를 통해 그걸 날마다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서 분노를 소멸시켜야 했다. 손가락 뼛조각이 떨어져 나간 나도 이럴진대 무고하게 피해를 당한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의 분노는 어떠하랴. 내 손가락이 이렇게 된 후에야 나는 일하다가 손가락을 다친 어머니의 심정을 10분의 1이라도 돌아볼 수 있었다.


파멸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재미로 시작한 주식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좋아 보여 잠깐 사귄 애인이 사이코패스라면... 잠시 친절을 베푼 사람이 스토커라면... 재미 삼아 한 채팅사이트에서 로맨스 스캠에 낚인다면...


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분노는 우리를 조심하게 한다. 많이 들떠 있거나 많이 화가 날 때 조심해야 한다. 죄를 지을 확률이 높아진다.


악행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고, 그 어지러워진 세상의 생명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세력이 있다. 전쟁 때문에 전쟁고아가 발생하듯 죄와 자비는 늘 가까이 있다.


성인이라면 내 등만 따시고 내 배만 부르다고 세상의 죄와 자비를 모른 체하는 건 너무 비겁한 짓 아닐까. 내 등이 따시고 내 배가 부른 것도 결코 나 혼자 힘이 아니니까. 성인이라면, 어른이라면 적어도 받은 것의 절반이라도 세상에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죄와 관계와 복수와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 <올드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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