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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n 30. 2024

불안해서 씁니다

나라는 존재는 개인으로서 소중하지만, 우주 전체(자연)의 일부로서 매우 보잘것없기도 하다. 목표를 세우고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행위는 개인으로서 중요한 삶의 지표이지만, 우주의 에너지의 일부로서는 그저 허무할 따름이다. 소멸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에너지의 지극히 작은 일부, 입자에 불과한 것이다. 삶의 이 두 가지 속성을 무시할 수도, 무시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50에 접어들면서 불안감이 심해지는 것 같다. 외로워서 그럴까? 죽음은 다가오지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 내 삶. 마치 곧 내려야 하는 정류장이 다가오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먼 열차 칸에,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말은 몇 마디 걸어봤지만 손을 잡아보지도, 눈을 맞춰보지도 못하고 그저 그 연인에 대한 희미한 느낌만을 가지고 하차하는 순간이 올 것 같은 불안감.


아침에 일어나면 수많은 잡다한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 내가 스스로 생명줄을 끊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짐들이다. 그 짐들을 겨우 정리하고 나면 여분의 내 시간이 남는데, 그 시간도 사실 온전한 자유의 시간은 아니다. 우리의 주위를 뺏는 여러 요소들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처럼 벽면 수행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완전한 자유는 없으며 완전한 자유가 온다 한들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완벽한 휴가라 생각하고 떠난 휴양지에서 기괴한 일을 겪는 것처럼 내가 생각했던 그 일에, 그 사람에, 그 장소에 행복이 없다면 이제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나?




니나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든지 의욕을 갖기를 그치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도 나는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코를 바람 속에서 벌름거리면서 사냥에의 욕망으로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나는 이미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의외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 그리고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야.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 가운데>라는 소설에서 서술한 이 명문장처럼 내 마음이 딱 이랬다.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갇힌 공간인가!!! 심지어 네 개의 벽 속에 갇혀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니... 실제로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여러 가지 물리적, 심리적 공간과 틀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화장이 되는 순간에도 관에 갇혀 있지 않은가.


그래, 사실 그렇다. 부인하고 싶지만 우리는 많은 속박 속에 살고, 자유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것인가? 미쳐 버릴 것 같은 감정.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는 무력감. 자연의 이치, 인체의 생리에 저항하기 위해서 밥을 안 먹거나 잠을 안 자고,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밤새워 영화만 본다고, 여행만 다닌다고 쾌락이 투자 대비 비례해서 올라가는 일은 없다. 곧 그것이 무리하는 걸 깨닫고 보잘것없는 신체의 한계의 갇혀 있는 나를 겸손히 깨달을 뿐이다. 심지어 영화도 세상의 많은 불안과 범죄와 공포를 즐겨 다루고 있지 않은가. 여가 시간에 그걸 보는 것은 과연 즐기는 게 맞을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스토킹 관련 실화 다큐를 두 편 봤다. 인간은 집착(몰두)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이 되면 무서워지고 범죄가 된다. 식물을 정성껏 가꾸면서 날마다 쳐다본다고 스토킹 범죄로 잡혀가진 않는다. 그 식물이 스트레스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내 아내조차도 내가 날마다 그녀를 쳐다보는 시간을 늘린다면 아마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나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할 것이다.


몰두는 성취를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 즉 내가 몰두해서 무슨 일을 한 것의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주목을 받든 혹평을 받든 몰두가 없다면 이 공허한 삶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벽면 수행을 하고 마음을 비우면 그것이 득도한 것일까? 우리는 평온을 위해 태어났나, 아니면 살기 위해 평온이 필요한가. 그것은 먹기 위해 사나, 살기 위해 먹나와 비슷한 발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전도서 4:2-3)


평온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성경 전도서 말씀처럼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은 것 아닌가.


아들이 결혼을 하면 나는 며느리에게 좋은 시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들들이 더욱 장성하고 굳건해질 때까지 나는 잘 생존할 수 있을까? 생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아버지가 되어 있을 수 있을까? 왜소한 외모 때문에 보호 본능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 아내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별로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힘든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까. 연로한 어머니의 남은 생을 여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 능력도 나에겐 없다. 나는 별로 효자도 아니고, 훌륭한 가장도 아니지만 이런 요소들도 다 불안의 씨앗들이다. 나라는 존재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하루아침에 으스러져 버릴 수도 있는데, 이들을 위해서 내가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게 꿈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다. 이런 불안이다. 


최근에 내가 낸 전자책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친구가 약간 냉소적인 멘트를 했다. 친구는 내가 만만해서 부담 없이 평가를 한 건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냉기가 느껴졌다. 내가 가장 가깝다고 여긴 어릴 적 친구였는데, 이젠 더 이상 시시콜콜 내 활동을 얘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안 그래도 힘든 음악과 글 활동을 굳이 그런 친구에게 인정받으려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여태껏 나를 이해하는 척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하고 싶은 거 하느라 애쓰네. 어차피 돈은 안되겠지만, 하고 싶다니 해봐. 어쩌겠어' 이 정도 마음이었을까.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더욱 외롭다. 산책을 나가면 벤치에서 멍 때리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보는데, 저 모습이 머지않은 내 모습인가 싶다. 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또 불안의 한 부분이다.


또 하나의 불안은 이토록 내가 집착하는 음악의 길에서 과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다. 등산을 시작했으면 적어도 백두산 정도는 올라가 봐야지, 동네 뒷산을 어슬렁거리다가 마감을 한다는 건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수치가 아닌가. 최근에 평소 애정하는 소프라노 이해원 님이 직접 심사한다는 가곡 작곡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 멜로디를 만들다가 포기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억지로 짜내듯이 대충 머릿속에서 완료된 듯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기하지 싫었지만 결국 아직 때가 아니고 역량이 멀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감으로만 작곡을 했고 한 번도 명곡 멜로디를 제대로 분석한 적이 없는 점, 이른 바 머니코드 진행들을 체화하지 못한 점, 정서가 메마른 점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해결책을 찾아서 다시 공부와 체험을 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관계와 성취와 미래와 존재에 대한 불안이 날마다 마음 밑바닥에서 나와 동거하고 있다. 잠시 여행을 떠난다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싹 가셔지지 않는 것 같다. 삶은 성취와 향유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단한 목표를 위해 날마다 고군분투만 하는 삶은 너무 고단하고, 성취를 향한 목표 없이 유유자적 즐기기만 하는 삶 - 그럴 수도 없지만 - 은 너무 따분하고 시시하다.


신을 믿으면 불안이 사라질까? 그래서 종교를 가지는 걸까? 그런 걸 떠나서 세상 자체가 너무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기후, 범죄, 전쟁... 사이좋게 지내다가 가기에도 짧은 삶에 너무도 많은 혐오가 판을 친다.


그래도 분명한 명제 하나는 살기로 한 이상 살아야 한다는 것,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도, 흙도 없이 화분에 그냥 꽂아둔 고구마에서 싹이 나는 걸 보고 같은 생명체로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 너도 그 척박함 속에서도 사는구나. 나도 살아봐야지.'


크몽에서 두 곡을 의뢰한 분이 세 번째 곡을 의뢰해 왔다. '뭐, 내가 소질이 영 없는 건 아닌가 보지' 이런 생각으로 가곡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우울함이 약간 해소가 되고 보상이 된다. 얼른 귀촌을 해서 소박하게 텃밭을 가꾸고 마당에 강아지를 키우면 그 생명들의 명랑함과 씩씩함으로 내 우울과 불안을 좀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메말라 버린 내 감성을 살리기 위해 평소 무관심했던 애니메이션, 감동 스포츠 다큐와 영화를 찾아보고,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소소한 여행도 다시 해봐야겠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속에서 음악이 나올 수 없으니까. 관계 속에서 좋은 공기를 퍼트릴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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