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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03. 2020

수단으로써의 혁명,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겁니까?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단견

 한 백인 남성 경찰관이 흑인 남성을 숨 막히게 해서 죽인 사건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국 사회엔 애도의 물결이 형성되며 죽은 흑인의 이름을 걸고 지금껏 억눌려 있던 울분을 마음껏 분출하는 중이다. 사실 그의 죽음은 촉매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이 정도 규모면 사실상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과도한 힘이 터져버린 것이다. 이번 사건이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이유는 이로 말미암아 미국 사회의 어두운 민낯, 본질적으로는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로 인해 곪을 대로 곪은 자리가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 아래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온갖 폭력, 방화, 범죄, 유혈 사태 등이 시위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일각에서의 주장이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어두운 면을 가리기 위해 공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죽은 흑인의 동생은 순진하게도 죽은 형의 이름과 욕망을 대신 말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요청한다. 실상 이번 사건은 인종차별 문제를 넘어서 존속하다. 그리고 좌파적 지식이 수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위의 본질을 인종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대대적 움직임이라고 규정했을 때 이번 미국에서 터진 혁명의 기조는 평화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미 이것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낡고 오래된 억압적 관행을 부수기 위해 피억압의 당사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적인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지만, 앞서 발생한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바이러스로 인한 안 그래도 좋지 못한 경제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시위는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외부에서 관조했을 때 지금의 폭력 사태는 악랄하고 야만적이고 치졸한 행위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경찰이 배치되고 최루탄을 쏘아대며 경찰차로 시위대의 행렬을 방해하는 등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방안이 시행되고 있지만 그 마찰로 인해 양쪽 서로가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중이다. 경찰은 시위대가 쏜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시위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과정에서 수천 여명의 시위대가 입건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그리고 최루탄 가스 때문에 실명된 사람들도 발생했다. 한인 상점들과 흑인이 운영하지 않는 상점들이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그들이 휩쓸고 간 곳은 폐허가 되었다. 이것이 혁명의 문제이며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들이 겪게 될 상실감을 차별이 완화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희망사항으로 보상이 가능한가? 아니면 나의 희생은 충분히 값지고 숭고했다며 추후에 기억될 역사에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위안삼아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간에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염두한 의지의 긍정성이지만 어디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각을 찾을 것인가? 혁명 자체는 필연적이지만 또한 공포와 함께 상실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역사적 주체로써 그리고 정신적 체험을 현현하는 주체로 나아가는 건 꽤 슬픈 일이다.


 내가 좌파적 지식을 옹호하는 이유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폭발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좌파적 지식의 옹호하는 목적이 모두 길거리로 뛰쳐나가 현존하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지금과 같은 극단적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좌파의 입장을 긍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혁명은 평화적이지 못하다. 애초에 평화라는 명목을 유지하기 위해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사회적 질서와 규범 따위를 붕괴시키는 것이 혁명적 움직임인데, 그것이 앞으로 도래할 더 나은 평화를 위한 전초로 삼는다는 건 모순적이기만 하다.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견지한 바, 비유적으로 블랙홀이 더 이상의 에너지를 함열하지 못했을 때처럼, 사회적 울타리가 더 이상 폭발적인 힘을 수용할 수 없을 때 파괴적인 힘이 외부로 넘쳐흐르는 것은 필연이다. 여기에서의 이념은 역으로 필연이 아니게 되며 그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 존립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현재 본질을 흐리고 있는 폭동과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시위를 어떻게 구분할까? 외부에서 보았을 때 그 형태를 가늠한다면 이 둘은 불가분의 양상을 띄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문제가 존속해 있다. 우선 단순히 주체가 타자화되어 상징적 질서에서 안위를 보장받지 못할 때의 문제가 시위의 본질이다. 흑인 부모가 아이들에게 경찰 앞에서는 절대로 뛰어서 안 된다고 교육한다는데, 그 자체로서 흑인은 모종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흑인의 존재는 타자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원래부터 더 큰 문제는 '가난'이었다. 시위대들이 상점가를 털며 약탈을 일삼고 있는데 만약 자신이 어느 정도의 만족을 추구할 정도의 충분한 사유재산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약탈이 일어날까?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아주 인도적이고 지극히 평화적인 차원에서 촛불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소비자로서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지언정, 어느 정도의 소비를 통해 삶을 꾸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평화적인 시위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긴 하되 그것이 전혀 충족될 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한 존재들이라면 전개되는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지 못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주체-주체 간의 괴리를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것이 주체의 발전을 규정짓지만 공격성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럼에도 시위대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루소의 망령이 되살아나 당대에 뜻을 함께 했던 철학자들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유재산 제도 폐지를 주장한다면 또 모를까.


 지금 상황은 혼란을 틈타 빈자들이 활개를 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를 통해 가난은 범죄와 더불어 있다는 오래된 공식이 시위라는, 폭동이라는, 혁명이라는 수단 속에서 '이 말은 언제나 항상 옳았노라'라고 선언하며, 우리에게 잊혔거나 또는 우리가 무관심하려고 애쓰던 진실이었다고 각인시키고 있다. 다시 언급하자면 이것은 필연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병폐가 질서의 일시적 붕괴에 의해 실존적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해 누누이 강조되던 정언으로써, 우리는 항상 타자를 존중해야 하며 가난은 이 세계에서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이 요청되지만 아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낫게 실패해야 한다. 가난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사실 부자들이 얼마나 큰 부를 취득하고 있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만큼은 그들에 대한 허탈감과 부러움, 시기, 질투,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의식적인 활동을 저조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으나, 부자들이 얼마나 갖고 있는 지를 염두하는 것보다는 빈자들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지가 고려된다면 세상은 그리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동안 지속된 불경기가 낳은 문제로 붉어진 취업난과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자가 될 수 없어, 자본주의에서 소외되기에 이르렀지만 문제는 이것에서도 포착되는 가학성이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방구석에서 굶어 뒤지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 사람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면 방구석에 가만히 누워 지난 삶을 고찰하며 후회하거나 반성하면서 자책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당장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져 길거리로 뛰쳐나와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간혹 보면 몇몇 사람들은 법, 규범, 도덕, 윤리가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켜줄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지키는 건 주권적인 믿음이며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호적이다. 언제든지 내가 아닌 타자가 이것을 어길 경우 너무나도 쉽게 환상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방구석에서 아사하는 건 당연히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탓해야 함이 옳다고 어렵지 않게 반박할 순 있겠으나, 이것만큼 맹목적이고 순진무구한 순종은 없을 것이며 눈깔이 뒤집어진 사람을 보고 비난의 말을 늘어놓는다고 사실상 달라지는 건 없다.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마찬가지로 시위대를 폭도라며 시위를 폭동이라며 비난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그 거대하고도 과격한 약동을 멈출 수 없다.


 이번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을 통해 글자로만 익힌 지식들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감회가 새롭지만, 혁명이란 개인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이며 기필코 피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분열과 해체를 거듭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적 철학과 급진적 사유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것이 하나의 필연이긴 하나 그 속에서조차 필연적으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에겐 이미 실패한 학문이다. 그러나 재차 강조컨데, 합리적 이기주의의 관점에서 이 사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절실히 따를 필요가 있으며 보수적 입장이 이를 옹호하는 건 당위성을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들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며 종국적으로는 통제-불가능성 앞에서 행운에 모든 것들을 맡겨버리는 선택을 내린다면 이 자체로써 수모인즉,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지칭이 어색해질 따름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쓸 데 없이 상상적이어서 겁이 많은 사람들에게나 이 말이 먹혀들 순 있겠지만 이 글의 취지는 아무리 비판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조차 말하기를- 비판은 누구나 한다. 대상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마치 인간의 본능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요구되며 그리고 철학자라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건적인 방법으로 이 세계를 변모시켜야 한다는 주관적인 지침은 금세 무색해지기만 한다. 그 까닭은 아직까지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무색함의 이유를 강화시키는 건 온건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어온 모든 역사적 움직임들이 실패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일어난 일들을 보고 주절주절 생각나는 데로 늘어놓은 것이긴 한데, 사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 적게 된 글이기도 하다. 평소에 딱히 말할 사람도 없거니와 입만 나불대기만 하면 하도 정신병자 취급을 해대서 말하는 게 귀찮아졌을 따름인데, 근본적으로는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른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과거가 그리운 이유가 있다면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항상 실패하긴 한다만 별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건대, 인종 차별 때문에 흑인이 죽게 된 사건을 발판 삼아서 시위자들은 매혹적인 구호 앞에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지만, 문제는 백인 경찰이 왜 흑인을 목으로 내리누르고 싶었는지가 더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흑인을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을까? 사실 죽지 않을 정도의 괴롭힘, 즉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척도인 '사유'와 거기서 발원하는 잔인성을 몸소 체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백인 경찰이 진압을 명목적인 이유로 흑인에게 가혹한 행위를 자행했지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여전히 불명료하다. 그가 평소부터 흑인을 쓰레기 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그럴듯하게는 동료 경찰 중 흑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적이 있어 앙갚음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의뭉스럽게도 지인과의 불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풀 대상을 찾고 있었다는 저열한 욕망을 가졌던 건 아닐까? 본인의 솔직담백한 고백이 아니라면야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서도, 나는 명확히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혹여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가. "이쯤 되면 화가 가득 차 올랐을 테니 한 놈 잡아서 흠씬 패줘야겠어!"와 같은. 이런 타인에 대한 적개심은 공공연하지만 대게 무의식적인 징후이다.


 인간 사회를 진화론에 비유하여 말하고는 하지만, 인간은 오히려 진화론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역설적 존재이다. 세상은 이미 어떤 의미로든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발전과 혁신을 목표로 삼지만, 자연에서의 퇴보가 주체의 죽음을 야기한다는 점에 반해 사회에서 주체의 퇴보가 타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는 건 진화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다. 이번 사건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해서 얻게 되는 것이 없는 듯한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리낌없이 표출한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 했을 때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분노하며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혐오가 만연해 가면서 주류적 감정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 혁명을 피하기 위해 예비적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무모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항상 급진적인 지식에 대한 논의를 머리에 달고 살지만 단연코 좌파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정도라서 다행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비굴하게만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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