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Feb 29. 2020

현실의 상상적 보충물로서의 '허구'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허구의 영역

 허구 :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듦.


 허구란 실제로 있을 법한 사건을 상상력을 이용해서 진실인 것처럼 꾸며내는 일이다. 허구는 우리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적이지만 사실이 아니며 진실로 보일지언정 결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허구적 장르를 접하면서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분명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 이유는 창작의 산물인 허구가 리얼리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허구든지 현실과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때로는 이 허구란 것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슬프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최근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국제무대에서의 연이은 수상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면서 불쾌감을 느꼈으며 '두 번 보기는 싫은' 영화라고 칭한다. 어떤 인물에 자기 자신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이유가 여러 가지일 테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정하자면 역시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안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굳이 내용을 적진 않겠다. 그러나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과연 엔딩을 보고 기우가 원하던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며 낙관적인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기우가 자신이 상상한 것이 충분히 이루어질 것이라 보며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뭘 해도 될 놈일 것이다. 반대로 낙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 불쾌감의 이유이다.


 영화 <기생충>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는 우리가 애써 지켜오던 경계를 침범했다. 여기서의 '경계'란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마주치게 되었거나 아니면 냉혹하게 관심조차 갖질 않아 인식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침범'이란 기우의 비참함을 자기 자신과 동일화하면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에서 연원하는 불쾌감이다. 대중들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체험하지 못했거나 또는 단연코 겪어볼 수도 없을 정서를 느낀 것이다. 또 영화를 본 누군가는 어느 정도 반목하는 정서를 가지면서 '나는 기우와 달라!'라고 말하고, 그 부정성을 떨쳐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은 가상의 인물을 무작정 비난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명확한 방법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허구인 이상, 허구의 영역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이렇듯 허구의 세계는 우리의 삶에 깊이 있게 파고든다. 영화를 예로 든 것처럼, 현시대에서는 영화가 가장 좋은 매체이다. 영화의 파급효과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재차 상기시킨다.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굳이 인식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인식하게끔 만들면서 볼 생각도 없는 것을 들추어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허구는 이런 기능을 담당한다. 허나 이것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실패는 우리에게 다른 의미의 불쾌감을 겪게 만든다. 그 불쾌감을 적절히 대변하는 사람들은 투자한 돈이나 들인 시간이 아깝다고 종종 말을 하는데, 그 원인은 자명하다. 작품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할 때이다. 허구 속의 주인공이 얼토당토않은 감정을 품거나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전개는 우리들의 감정 이입을 방해한다. 가령, 슈퍼맨과 베트맨의 싸움에서 갑자기 원더우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서 상황을 종식시킨다는 고대 그리스극에서나 사용하던 연극 장치를 들이는 순간에 -원더우먼이 아무리 멋있게 등장한다고 한들- 관객들은 난감한 상황을 면치 못한다. 이야기는 반드시 독자의 이해 범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개연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중의 냉담한 시선 아래에 놓이게 된 작품은 아무리 질이 높고 극찬과 호평을 받는다고 해도 그 진중한 의미는 퇴색되기 십상이다.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영화 <기생충>에 관한 리뷰를 본 터라 그런 것이다. 영화는 명목적으로 계급 사회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여전히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집어낸다. 그리고 계급의 가장 하단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그 사람들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만행(?)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 그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중받고자 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진실되게 사실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내가 본 리뷰의 내용은 기생충 영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닌 영화를 본 관람객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즉 그 글은 대중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은 오직 봉준호 감독이 국제무대에서 수상한 덕에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기택'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허구가 유희로만 소비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확실히 수상의 영광에 가려져 현실의 불합리성과 가련한 운명들은 도외시되고 있었다.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안락을 찾고자 한 사람들은 내일 해가 뜨면 '기택'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당장 코앞의 업무를 떠올려야 한다. 기택을 생각하는 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기택'은 무관심 속에서 잊힐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허구에서의 즐거움이란 현실에서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데에 치중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건 허구가 결코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어떤 우수한 문체나 화려한 이미지들 아니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허구'로 인지됨에 따라 현실의 경계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허구는 항상 현실로 넘어오기를 고대하지만 빈 틈이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그 의미가 전달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슈가 된 것은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배우들이 청와대에 가서 '짜파구리 만찬'을 즐긴 것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축하 자리를 만드는 건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느꼈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그 광경에 분노했다. 영화에서 허구적으로 연출된 상황이 실제로도 벌어졌다는 것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혹여나 봉준호 감독이 예술가를 넘어 진정한 혁명가적 기질을 갖춘 자인가? 앞서 언급한 데로, 허구는 유희거리로 소모될 뿐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허구 속에서 느낀 감정을 금세 잊는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뉴스에 나온 '짜파구리 만찬'은 허구가 아니다. 이번 사건이 대중들에겐 허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미지를 뚫고 나오면서 현실의 벽에 금이 간 것이다. 이 파괴성은 허구가 실상에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재차 각인시켜 준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의해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한 번 더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들의 좋은 이미지를 깎아 내리면서 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사람은 원하는 데로 믿는 경향이 있다. 욕망은 어떤 사실들을 끌어 모으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인식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번 일은 '포퓰리즘'을 넘어설 수 없다.


 허구의 세계에서 인간은 미적인 것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이것보다는 '실재'라는 토대 위에 삶을 구축한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지구 자전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괴력을 가진 인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유쾌한 말을 던지는 너구리라던가, 두 개의 자아를 가진 초록색 피부의 초인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가련하고 비참한 인물을 만드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그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이해한다. 상상적인 들과 실재적인 것들 사이에 텅 빈 공간 말이다. 그리고 그 간격을 채워 넣는 건 '문학적 감수성'이라고 불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것이 현실의 논리 법칙을 배반하려고 드는 순간 불만을 품는 자들도 함께 생겨난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자들이며 그 감수성의 황당무게함을 들추어내는데 집중한다. 그들은 상상적 오류에 일침을 가하면서 작품의 비현실성을 고발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합리론적 사고에 대한 이상을 불러 들이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는 자기애적 반향들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특히 능력주의를 맹종하는 사회에서 지적인 사람들이 찬양받아 그런지 사람들이 '이성적' 아니면 '논리적'이라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특히 논쟁 시에 상대의 기세를 꺽기 위해 상대방의 논변이 이 개념들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반박의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그 반박이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승리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표현이 들어 맞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논쟁에서의 승자는 화내거나 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화를 낸다거나 욕을 한다는 건 할 말이 없는 쪽이 쉬이 선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한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점철된 채 나타나는, 라캉적으로는 '자동인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내 머리일 것이다.


 그래서 허구란 대체 무엇인가? 앞서 허구가 현실에 기여하고 있는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허구는 현실적이라는 표현이 꽤나 어울린다. 허구는 '욕망' 자체에 연원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주체의 근본적 욕망이다. 허구가 현실적 세계를 반영하지만 욕망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실의 이면이란 충족되지 않은 것, 즉 '현재적 불가능성'이다. 허구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이것이 욕망의 관점에서는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면서 지금 당장에 실현되지 않은 무언가이다. 반면에 만약 허구에 위치한 사건들이 현재에서도 충분하고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면 허구는 즉각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변화한 현재에 맞추어 작금의 시대를 초월한 또다른 기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현실적'이라는 표현을 참 좋아해서 현실적으로만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 역시 항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표는 항상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다시 영화 <기생충>애서 의도된 바를 살피면, 봉준호 감독은 혁명의 주체들이 선정해야 할 혁명의 대상이 모호해졌다는 점을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즉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 에너지는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방향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언제나 방향은 중요하다. 방향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그러나 과연 에너지가 충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을 실행에 옮길만한 힘이 충분한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영화라는 분야는 축적된 심적 에너지를 불출시키는 수단으로 아주 탁월하게 기능하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가 항상 즐기는 어떤 무언가들은 이미 이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야구장에 가서 투구를 잘못한 선수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고, 달달한 초콜릿 한 점으로 울분이 싹 씻겨지기도 하고, 요즘 불어오는 건강에 대한 관심들은 운동을 더 하기 위해 건강해지려고 하기 까지 한다. 또한 길가에 우연히 마주치는 길고양이에 의해 어떤 무거운 마음을 일시적으로나마 내려 놓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이런 방법들이 건강한 정신을 위한 심리 치료들에서 권장하는 방식인 것이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다. 하물며, 마음이 힘든 사람들은 교회나 절을 찾아가서 석가모니나 예수의 조형물 앞에서 열심히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그런데 이것이 대중일반적 모습이며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던 삶의 방식일 것이다. 혁명을 바란다면 애초에 분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나 해체해야 할 대상은 권력이 아닐 지도 모른다. 어떤 불온한 마음을 가진 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오히려 분석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의 우울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 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우울하다면 금세 그 우울을 이겨낼 만한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물론, 우울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이것을 일부러 선택했다면 불행한 두뇌를 가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국종 교수님을 굉장히 존경하는 터라, 그분의 인터뷰 영상과 행적을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편이다. 교수님은 항상 어떤 시스템 상의 문제를 계속해서 공시하며 '정의'에 대해 외쳤다. 그런데 아주대 외상센터장을 그만두면서 터져 버린 회의감이 향한 곳은 그가 비판을 마지 않던 '시스템'이 아닌 대중들이었다. 종국적으로 그가 회의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일반 대중들 인즉, 잠에서 깨면 출근 길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퇴근 후에 조금이나마 더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이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의 삶을 문제 삼는다면 문제를 삼는 사람이 오히려 더 문제적으로 보일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국종이라는 한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가 실패하면서 현실과의 괴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무의미함'이라는 좌절로 자신의 삶 전체를 회의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가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자가 아닌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있었더라면 모든 것들을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저버릴 수가 없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나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고통스러운 무언가로 이해되긴 하되, 욕망의 잔여물이란 항상 생산을 부추기는 힘이다. 라캉의 말을 빌리면 욕망이란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 항상 생산적인 것'이다. 그리고 말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건 언제나 무의식이 승화된 지점에서 탄생하는 작업물인 '허구'였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느끼면서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창조된 영역을 '미적인 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즉, 욕망의 잔여물이 '찌꺼기'로 인식되는 순간에 진정한 퇴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퇴행'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온갖 부정적인 느낌이나 사고 작용을 갖다 붙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겐 '퇴행'은 오히려 새로운 소재거리가 될 터이다. '찌꺼기'로 전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은 찰나적이고 열광적이며 호색했고 철이 없었으며, 의심하고 신뢰하는 데 있어서 경솔하고 충동적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영혼은 보통 감추어야 할 어떤 결함을 가리고 있으며, 때로는 작품을 통해서 내면의 상처에 보복하려고 한다. 때로는 드높이 비상함으로써 너무나 강한 기억에서 도피하려고 하며, 때로는 진흙탕에서 뒹굴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며, 늘 언저리를 떠도는 도깨비불처럼 되어 자신을 별로 착각하게 만들며 - 이 경우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 -때로는 오랜 자기혐오와 반복해서 나타나는 자기 불신의 망령과 싸운다.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ps. 그냥 한 번 적어본 글.


작가의 이전글 노숙자에 대한 편견이 깨진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